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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Oct 04. 2023

어느 페미니스트와의 대화



얼마 전 개인적으로 한차례 멘탈이 크게 흔들린 경험이 있어 이를 공유해 보고자 한다.






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영어 중에서도 회화가 특히나 많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외국인 튜터와 주 1회 줌 수업을 통해 회화를 연습해 오고 있었는데 사건은 수업 중에 일어났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화상 대화를 이어왔기에 강사와 나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꽤 심도 있는 대화까지 종종 나누어 왔다. 그 때문에 나는 강사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사실 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특히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난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자본주의를 옹호하진 않지만 전면으로 부정하기엔 인류가 누린 혜택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애써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입장에 있다.



그날은 어쩌다 보니 시작부터 자본주의 얘기로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강사는 자본주의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토로하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락 중심의 공동체 주의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나는 그 말에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나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나 : "그런데, 만일 인류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농업사회로 회귀하게 되면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다시 약해지지 않을까?"



자본주의로 인해 파생된 여러 문제와는 별개로, 그로 인해 산업이 고도화되었고 그렇게 3차 산업을 중심으로 사회가 변화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의 배경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질문을 던진 즉시 속으로 후회했다.

강사가 눈을 번뜩이며 본격적으로 전투 자세에 들어간 것이었다.

건드려선 안될 역린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나는 한참이나 강사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가 하는 말에 동조하며 속으로 꽤나 진땀을 뺐다.

평소 강사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꽤나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사가 말한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이었다.




강사 : "만일 세상에 남자가 없어지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거야!"



기술의 발전으로 유성생식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다는 가정하에 만일 사회에 오직 여자만이 남는다면, 인간은 폭력도 없고 전쟁도 없는,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껏 페미니즘을 남녀평등과 유사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성별이 남자인 존재를 모두 부정하다니... 이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 "하지만 과거 많은 남성들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느냐?"



왠지 억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들어 이렇게 항변했지만, 이어지는 강사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강사 : "그거 알아? 그 전쟁을 주도한 건 언제나 남자였어. 여성이 주도해 일어난 전쟁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야. 범죄율만 봐도 남자가 압도적으로 높잖아?"


나 : .....


불쾌한 감정과는 별개로 생각이 깊어졌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없진 않았기에 일견 왜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부터 지역 갈등이라든지 세대 갈등과 같이 그러한 범주 화를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었기에 그 심정은 이해는 갔지만, 막상 내가 그 범주의 대상이 되고 보니 참으로 불쾌하고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찝찝하면서도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지만, 시간상의 이유로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아마 시간이 더 주어졌어도 나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한 이틀 정도는 신선한(?) 충격에 정신이 멍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대화는 내 머릿속에서 꽤나 오랫동안 의문이 되어 남겨져 버렸다.






그 강사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폭력적인 결과를 초래한 남성들과 내가 순전히 생물학적 성별의 동일성 말고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건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의 공통적인 성질의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까?


정말로 아마조네스 부족처럼 여성만 있는 사회가 실현된다면 폭력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올까?


이러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예상컨대 그런 세상이 온다 해도 결국에는 또 다른 갈등으로 서로 반목하고 다투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나에게 새로운 물음을 던져 준 강사에게 고맙지만, 왠지 그녀와의 대화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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