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말랭이에서 햇볕을 발견한다. 발견보다는 복기에 가깝다. 말랭이를 쳐다보고 맛보고 냄새를 맡아봐도 감각기관은 말랭이 속 햇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랭이에서 햇볕을 찾으려면 말랭이가 지나온 시간을 상상해야 한다. 말랭이가 말랭이가 아니었을 때를 기억해야 한다. 말랭이가 말랭이가 되기 위해 건널 수밖에 없던 시간을 복기해야 한다. 그래야 말랭이에게 스민 것들을 볼 수 있다.
안진영은 대상을 톺아보는 시인이다. 어떤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살핀다. 지금-여기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대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나온 말은 그대로 위로의 언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주려고 다가오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위로받기 때문이다. 말랭이에 말려 들어가 있는, 이제는 사라졌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햇볕은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건 사라진 햇볕에게 위로가 되었으리라.
최재천이 말했듯,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는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면 사랑한다.”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말랑말랑 말랭이”가 원래 “사각사각하는 무”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각사각하는 무”에 “햇볕도 같이 말랑말랑/ 말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살아온 시간을 알면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면 걱정하고 응원하고 위로하게 된다. 『난 바위 낼게 넌 기운 내』(문학동네, 2019)라는 짧은 말이 단단한 위로로 다가오는 이유는 시인이 보여준 사랑 때문이다.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을 사랑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