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화자를 시인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시는 고백의 언어이지만, 시인은 시적 주체를 통해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말>이라는 작은 단서를 근거로 하여, 위의 말을 송현섭의 목소리로 읽고자 한다. 스스로를 "왕국의 주인"이라고 칭하며, 엄청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동시집을 낼 수 있어서 영광이고,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는 여느 동시집의 겸손함과 사뭇 다르다. 한 권의 동시집을 엮어서 세상에 선보인다면 이 정도 배짱과 자신감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시인은 자신이 왕으로 살고 있는 세계에 독자를 초대한다. 다만, "넌 엄청난 행운아가 된 거야"라는 말이 독자에게로 한정된 것 같지 않다. 동시를 쓰는 시인을 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매우 이질적이고 이단적인" 그의 동시를 읽고 나서 판단하는 것일 수 있겠다. 나는 사후적으로 판단했지만,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동시집을 읽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기존의 동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의심하고" 배반하는 방법을 "추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기존의 동시에서 배제되었던 어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젠장, 삥, 꺼져 등의 단어는 동시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동시에서 배척되었던 어휘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또한,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무거운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 기존의 동시에서는 죽음을 주로 슬픔, 애도, 위로의 태도를 가지고 바라본 것에 반해, 그의 동시에서 죽음은 하나의 소재에 불과하다. 직접적인 죽음이거나 죽음이 연상되는 이미지, 죽음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이미지는 그의 동시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나무 위 고양이>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 어둠의 이미지를 탐구하는 시인의 시적 자아가 보이는 것 같아 소개하고자 한다.
시의 화자인고양이는 문제를 내고 있다. 자신이 부엉이를 닮은 올빼미인지, 올빼미를 닮은 부엉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세 마리의 까치인지. 우리는 제목을 통해 고양이임을 알 수 있지만, 고양이의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어두운 밤에 형체만 분간할 수 있는 고양이 실루엣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밤의 어두움, 고양이의 음침한 목소리 뿐이다.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고 선명하지 못하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이 시에서 쉽게 떠나지 못한다. 실루엣처럼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 자체가 또렷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시인의 시적 자아인 것 같기도 하다. 어둠 속에 숨어서 독자를 어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어둠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모습이 마치 시인의 표상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