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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Nov 15. 2023

기뻐의 비밀,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서

《기뻐의 비밀》(이안, 사계절, 2022)

이안, 이아아안!


누가 자꾸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마리골드



빈집이 많은 골목 안


녹슬고 구멍 난 철문 옆 화단에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


환하게 와 있었다


헤어진 친구에게 보내는 마음*같이


*마리골드 꽃말


-<마리골드> 전문


첫 행 “이안, 이아아안!”이 없어도 작품의 주제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첫 행이 없었다면, 마리골드의 목소리를 듣는 “이안”의 자리에 독자는 자기 자신을 두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시인은 왜 직접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마리골드>는 일종의 ‘작가와의 만남’이다. 독자는 “이안, 이아아안!”이라고 하며 시인을 “자꾸 부르”게 된다. 이름을 부르니 시인은 독자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시인은 이런 효과를 생각하며 자신을 시에 등장시킨 것은 아닐까. 독자에게 바짝 다가가 동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와의 만남’이 동시와의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꽃마리 꽃은 정말 조그매하다

얼마나 조그매하나면

채송화 눈곱보다 조금 더 조그매하다

그렇게 조그매한 애가

나를 자기 앞에 바짝 꿇어앉히더니

뭐랬는 줄 아니

자기를 잊지 말래

그 조그매한 눈을 똑바로 뜨고

꼭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발음도 아주 조그매했지


나를 잊지 말아요*


*꽃마리 꽃말

-<꽃마리 꽃말이> 전문


현재 우리 동시의 위치는 “꽃마리”처럼 “정말 조그매”해서 무릎을 꿇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100만부 동시집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판매량을 기준으로 어린이책 순위 50위 안에서 동시집은 찾아볼 수 없다.

조그매한 “꽃마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꽃마리”의 강렬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기뻐의 비밀》이 가진 강렬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안에는 독자를 “바짝 꿇어앉히”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기뻐의 비밀》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은 ‘그림자’ 동시를 지나는 일이다. 《기뻐의 비밀》은 총 4부로 구성되어있고, 각 부의 처음과 끝에는 “그림자” 동시가 배치되었다. 동시집을 네 개의 방이 직선으로 연결된 집으로 본다면, 각 방을 연결하는 문에는 “그림자” 동시가 있다. 그림자 동시는 《기뻐의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같이 있어 줄게


나만은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아


-<그림자 약속> 전문


<그림자 약속>은 《기뻐의 비밀》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말을 건네는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림자 약속>은 ‘그림자’가 ‘나’에게 건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림자’에게 건네는 말일 수도 있다. 각각에 따라 시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림자’가 ‘나’에게 건네는 말로 생각한다면, <그림자 약속>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다. 절대적인 나의 편이 하나 있다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반대로, ‘나’가 ‘그림자’에게 건네는 말로 볼 수도 있다. 이 때, 그림자는 정신분석학적 용어로서 “어두운 나”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가 내면의 ‘어두운 나’에게 “네 곁을 떠나지 않아”라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모습까지 포함한 나의 전부를 사랑하고자 하는 다짐의 약속이다.

동시집의 첫 작품이라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그림자 약속>은 시인이 독자에게 건네는 약속이다. “너에게 주는 말이니까 이제부터 네 말이야”라는 시인의 말처럼 《기뻐의 비밀》의 모든 동시는 너를 떠나지 않고 위로가 되어주겠다는 따뜻한 약속인 것이다.


모닥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강물에 떨어져도 가라앉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고?


그렇담 먼저,

시의 그림자를 구해 오겠니?


-<그림자 시> 전문


《기뻐의 비밀》을 통과하는 두 번째 문은 <그림자 시>다. 시인은 ‘불멸의 시’를 쓰고 싶다면 “시의 그림자”를 구해 오라는 주문을 한다. “시의 그림자”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새의 그림자를 보고 새를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시의 그림자는 시를 상상하게 하는 매개체가 아닐까.

정재승 박사가 어느 매체에서 상상(想像)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한 적이 있다. 인도를 탐방하고 온 어떤 중국 사람이 자국의 사람들에게 코끼리의 존재를 이야기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에서 코끼리 뼈를 밀반입하였고, 중국 사람들은 코끼리 뼈를 통해서 코끼리의 모습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상상(想像)의 어원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이 코끼리 뼈라는 구체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몽상에 불과하다.

“시의 그림자”는 ‘코끼리 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중국 사람들이 코끼리 뼈를 통해 코끼리를 상상한 것처럼, 우리는 시의 그림자를 통해 시를 상상할 수 있다. 문득, 반대의 과정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코끼리를 보고 코끼리 뼈를 유추하는 것처럼, ‘시’를 보고 “시의 그림자”를 찾는 과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시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그림자 눈사람이 왔다

눈덩이 따라

돌돌돌돌 굴러서 왔다


눈사람이 녹아 없어질 때


그림자 눈사람은

없어지는 눈사람을

꼬옥, 껴안았다


-<그림자 눈사람> 전문


<그림자 눈사람>은 《기뻐의 비밀》 마지막 작품이다. “없어지는 눈사람을/꼬옥, 껴안”는 모습에서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그림자 약속이 떠오르며 자연스럽게 두 작품은 연결된다. 마치 처음과 끝이 만나 그 안의 작품들을 품어주는 것 같다.

‘그림자 동시’는 각 부의 처음과 끝에 배치되었고, 처음과 마지막 작품의 내용은 연결된다. 배치와 내용의 연결을 통해 《기뻐의 비밀》의 모든 작품은 그림자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시인은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고 눈물 속에는 웃음이 산다. 마찬가지로, 그림자 저편에는 빛이 있고 웃음 속에는 눈물이 산다.”라고 말했다. 독자는 《기뻐의 비밀》을 읽으며 그 속에 숨겨진 그림자와 빛 그리고 눈물과 웃음을 생각한다. 이 동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기뻐의 비밀>에는 어떤 그림자와 빛, 눈물과 웃음이 숨겨져 있을까.


내가 기뻐의 비밀을 말해줄까?

기뻐 안에는

이뻐가 들어 있다

잘 봐

왼손으로 ‘기’. 오른손으로 ‘뻐’를 잡고

쭈욱 늘리는 거야

고무줄처럼 말이야

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뻐

어때, 진짜지?

기쁘다고 너무 뻐기다가

기뻐를 끊어 먹지 않도록 조심해

너도 알다시피,

길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이잖아?

기뻐가 끊어질 땐 무지 따끔해

어쩔 땐 찔끔 눈물이이 나아


-<기뻐의 비밀> 전문


시인은 기뻐를 “쭈욱 늘”려서 기뻐 안에 이뻐를 찾는다. 그리고 “기쁘다고 너무 뻐기다가/기뻐를 끊어 먹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기뻐가 끊어질 땐 무지 따끔”하기 때문에. ‘기뻐’ 속에는 ‘이뻐’와 함께, 끊어져서 따끔, 눈물이이 나게 하는 기뻐의 그림자도 숨어있는 것이다.

“기뻐 안에는/이뻐가 들어 있다”는 것은 “이뻐”가 “기뻐” 안에 숨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뻐의 비밀>은 숨어있는 목소리와 이야기를 찾는 일이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우리에게 숨어있는 목소리와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리의 그림자와 빛, 눈물과 웃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의 그림자는 어떤 눈물과 웃음의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까.


《기뻐의 비밀》과 함께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 가 본 길”이 펼쳐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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