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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May 03. 2024

작은 손길은 우주를 견디는 힘이 됩니다

문이소의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2023, 문학동네)

 문이소 작가님의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을 읽었습니다. 오감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는 총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렸습니다. <소녀 농부 깡지와 웜홀 라이더와 첫사랑 각성자>, <젤리의 경배>, <유영의 촉감>, <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입니다. 글의 주제와 관련된 주된 소재는 음식, 음악과 그림 및 영상, 도예의 촉감, 색깔 입니다. 나열된 소재만 보더라도 오감이 자극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유영의 촉감>은 감각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 밖에서 온 생명체인 '히니긴 옌덴 마요린'은 선대가 남긴 기억의 한 조각을 찾기 위해 아드 롱센 권역의 여덟 개의 은하를 떠돌고 있습니다. 기억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한다면 '단절자'로 격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자화되지 않은 기억은 모호하여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지구에 '유영의 촉감'이 있다는 말을 전해듣습니다.

 '강유영, 유영학, 유영한복, 유영떡볶이, 유영커피 등 유사 유영까지 포함하면 200만 개'가 넘는 지구에서 마요린은 '유영이랑 흙놀이 채널 운영자' 유영을 만나게 됩니다. 유영은 여성청소년으로 변한 마요린을 성추행 현장에서 구해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해 남성을 다른 시공간에 가둬버린 마요린을 현장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덕분에 다른 남성들은 마요린의 아공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요린은 유영을 따라 도자기 공방으로 갑니다. 유영과 함께 도자기를 만드는데, 도예 장면이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세밀한 묘사 덕분에 독자는 도자기 굽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작품집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음식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이 재생되는 모든 장면의 묘사가 정교하고 자세합니다. 묘사가 주는 감각적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자기를 만들며 지각한 감각은 마요린이 찾는 유영의 촉감이 아니었습니다. 마요린은 도자기를 다 만들고 작별인사를 건낼 때 유영의 촉감을 느낍니다. 다음 장면입니다. 


난 주먹을 내밀었다. 친구 유영도 주먹을 내밀었다. 꽉 쥔 주먹이 닿자 친구의 주먹이 뒤로 물러나며 부드럽게 펴졌다. 손가락이 춤을 추듯 파르르 떨렸다. 손가락 사이로 빛이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유영이 건넨 주먹인사에 마요린은 "가슴 어딘가가 톡" 열리고, "방울방울한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요린이 말하길 그건, '다정함'이었습니다. 선대가 남긴 촉감은 다정함, 친구의 다정한 손길이었습니다. 선대는 그 감각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선대가 남긴 기억을 찾은 마요린은 광활한 우주를 함께 여행하고 있는 디든 콰렐에게 돌아갑니다. 마요린은 우주의 광막함을 견디고 단절의 외로움을 접어둘 수 있었던 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주 작은 다정함의 손길은 무한히 넓은 우주를 견디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말이나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추가. 

1. 감각적 심상을 잘 활용하지만, <젤리의 경배>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영상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1차적인 이유는 내가 음악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 음악이 조금 더 느껴지도록 쓰였다면 어땠을까 한다. 나는 이 책을 ebook으로 읽었는데, 웹툰에서 활용되는 기술처럼, 해당페이지에서 배경음악이 재생되는 기능이 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2. 1과 관련된 내용으로, 소설에 사용된 어휘가 다소 생소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새로운 질서와 논리를 마련해야 하는 sf소설의 특징일 수 있겠지만, 직관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어휘가 있거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이 과학 교과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버섯을 재배하는 방법이나 오래된 악기의 이름과 같은 경우에서 그랬다.

작가의 이전글 20년 전 출판된 동화를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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