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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May 16. 2024

미래의 기술을 상상할 때

오동궁의 SF청소년소설『내가 아는 최다미』(씨드북, 2023)

 청소년 SF시리즈 내일의 숲 다섯 번 째 소설, 『내가 아는 최다미』를 읽었습니다. "사람의 몸이 사람에게 주는 가능성과 한계, 이로 인한 자아의 성찰과 붕괴와 성장, 그것이 인간관계와 사회에 미치는 여파를 주제로 글쓰기를 즐긴다."는 작가님의 소개처럼, 몸의 가능성과 한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은결이와 다미는 '의체'로 살아갑니다. 의체는 기계의 몸을 말합니다. 뇌를 연구소에 보관하고, 뇌에서 보내는 전파를 통해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다미는 골수암을 극복하지 못해 신체적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수영을 하지 못해서 좌절합니다. 다미의 보급형 의체는 물에 들어가면 고장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결이는 수영을 할 수 있습니다. 게놈 맞춤형 의체이기 때문에 물에 들어갈 수도 있고, 다미가 그토록 원하던 수영 전국체전에도 출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이보그를 위한 대회만 출전할 수 있지만요.

 게놈 맞춤형 의체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유전자 정보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래 신체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니까 게놈 맞춤형 의체는 성장의 한계가 뚜렷합니다. 원래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성장 가능성을 계산하고 그 이상의 기능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연습과 노력을 한다고 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다미의 보급형 사이보그는 대회를 나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학교 수행평가에서 A,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유전자 정보에 입력된 한계가 아닌, 기계의 성능이 곧 신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은결이는 다미에게 몸을 바꾸자는 제안을 합니다. 은결이는 아빠의 강요에 따랐던 수영을 그만두고 싶고, 다미는 수영을 계속 하고 싶어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은결이는 몸은 남자이지만, 영혼은 여성입니다. 은결이의 제안은 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몸을 바꾸게 됩니다. 몸을 바꾸려면 양측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미성년자는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은결이는 이혼한 엄마의 동의를 받고, 다미는 동의해주지 않을 것 같은 엄마 대신 본인이 직접 사인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몸을 바꾸는 일이 이렇게 간단하다면, 많은 악용 사례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범죄에 활용될 수 있고, 온갖 부정한 일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F에서 구축한 설정이 서사 속 세계에 일반화되었을 때 결과를 생각하고 검증하는 일은 서사의 개연성 확보에 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는 SF에 구축된 설정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한 장면에만 적용되는 설정은 독자의 의문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몸을 바꾼 은결이와 다미는 각자의 욕망을 실현하며 생활합니다. 은결이는 화장을 하고, 남성으로 입기 어려운 옷을 입어보고, 평소 좋아했던 남자 아이와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다미는 수영을 마음껏 하고요. 다미는 은결이의 몸으로 전국체전 출전 기회를 얻어 냅니다. 물론, 사이보그만의 경쟁이고, 참가자가 3명 뿐이라 2등 안에 드는 일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문제는 평소 은결이를 질투하던 서호였습니다. 서호는 수영부 에이스이지만, 전국체전 티켓을 따지 못했습니다. 서호는 은결이에게 시비를 걸고 둘은 말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은결이, 은결이의 몸을 한 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인도 운동할 권리는 있어". 사실 이 부분에서 많은 시간 멈췄습니다. 사이보그를 장애인으로 표현하는 일이 옳은 일일까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이 말은 다미의 생각이 아닙니다. 실제 사이보그 대회는 장애인 경기의 한 분과로 열리게 됩니다. 사회에서도 사이보그를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보그를 장애인으로 보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문제로 인해 사회에서 여러 불편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이 불편한 이유는 사회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힘든 원인은 한 개인에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구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보그를 장애인으로 규정하는 사회는 장애인을 일반인, 정상인과 다른 신체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이보그로 살아가는 기술이 보편화된 사회라면, 그만큼 기술이 발전된 사회라면 문화나 제도 또한 발전했을 것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또한 눈부신 발전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보다 후퇴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기술만 발전한 사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 사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시간적 배경이 마치 현재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작품 어디에도 시간적 배경이 미래라는 단서는 없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술이 상용화되었기 때문에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기술, 마주할 수도 있는 기술이 펼쳐지는 세계를 그릴 때에는 그와 더불어 제도의 발전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면서, 우리가 직면할 딜레마에 대해 미리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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