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방영하는 <한 번쯤 이혼할 결심>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본다. 스타 부부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가상 이혼’을 준비하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부부들의 사연 중 축구선수 정대세와 대통령 전용기 승무원이었던 명서현 부부의 이야기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남편 정대세는 충분히 선수로서 경기를 할 수 있는 시기에 은퇴를 했다. 일본에서 내조를 하던 아내는 시어머니와의 고부 갈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던 상황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던 아내의 말에, 가장으로의 책임감과 꿈 사이에 갈등을 하다 은퇴를 하고 한국으로 향했다. 남편은 은퇴 이후 처가살이를 하며 본가로 가지 못하는 아쉬움과 불안함에 부부 관계에서 불만을 토로한다. 지난날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아파하던 아내는 함께 비행하던 동료를 만나 대통령 전용기 승무원 시절을 회상하며 어느새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며 고민을 털어놓는다.
“집에 있으면 내가 상대하는 게 아이거나 남편 밥을 하는 것 밖에 없으니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만 사는 게 내 존재가 없는 것 같은 거야.
살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 “
“결혼하고 아이 때문에 일도 그만두었잖아.”
“아이 때문은 아니고 남편 때문이지”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아내는 승무원 시절에 입었던 유니폼을 다시 입어본다. 옷이 다행히 사이즈가 맞다며 내친김에 승무원 머리까지 해본다.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며 올림머리를 하다가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만다. 옷은 그대로인데 거울 속 보이는 자신은 머리도 빠지고, 기미도 생기며 달라져 버린 모습을 보며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결혼을 하고도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일찍 결혼을 했기에 아이는 조금 뒤에 낳을 계획이었다. 남편은 내게 상의하지 않은 채 생활비를 부담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홧김에 한 시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알았다. 남편이 받은 월급은 시어머니의 카드값을 내주고 있었던 거다. 결혼은 했지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지 못했고 남편은 여전히 아들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시간부터 그 후로도 스트레스로 몸이 약해져 있었고, 갑상선 질환을 의심할 만큼 살이 빠져 말라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남편과 가정을 이뤄가기 위해서 잠시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정했다. 남편이 가장의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곧이어 아이가 생겨 나는 직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OO의 엄마, OO의 아내로서의 삶만 내게 남아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묻는 이는 없었다. 가끔 나조차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철이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내로서 엄마로서 책임 만다 하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주위에 먼저 결혼을 한 선배들이 있었다. 아이의 스케줄에 따라 자연스레 그녀들의 일과도 움직었다. 자기 분야의 경력과 경험이 있음에도 ‘왜 일을 하지 않는지’ 묻는 내가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금방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가정을 위해’ ‘엄마로서’ ‘아내로서’라는 명분에 갇힌 나는 고작 이십 대 중반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경험을 건 가혹한 일이었다. 나의 선택이 있건만 당시의 나는 여자로서 결혼 후의 삶이 그렇게 달라진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가끔 만나는 친지들 조차 ‘부모님 일을 도와야지.’ ‘남편 일을 도와야지.’ ‘시댁에 가야지.’ 등등해야 하는 책임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가족도, 사회도, 나보다는 나의 역할과 책임을 물었다.
나를 할퀴던 억울함은 ‘남편과 결혼해서’라는 이유를 불러 세웠다. 결혼을 하고도 여전히 아침마다 출근을 하며 갈 곳이 있는 남편이 미웠다. 시간이 나면 운동을 하고, 닭가슴살을 먹으며 자기 관리를 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변할 필요도 없고, 망가진 곳도 없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남편은 가해자, 나는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만약 조금 더 성숙했다면, 그때 싸워야 할 대상이 우리 둘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가족 상담에서는 ‘희생양’이라는 개념이 있다. 가족이 요구한 어떤 역할을 한 가족 구성원이 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여 갈등의 원인을 평가한다. 부부에게 사회가 부여한 요구와 기대, 원가족에서 바라는 역할들, 혼자 아이를 키워야만 하는 엄마들의 외로움과 소외감, 경제적 부담감까지. 부부가 외부의 환경에 맞서 한 팀이 되어 싸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배우자를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사는 가족의 기대와 사회의 시선과 요구에 대해, 부부는 한 팀이 되어 싸울 수 있었다면 그 시간이 조금은 덜 아프고 고달팠을까.
결혼 후 혼자서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진 나는, 외롭고 쓸쓸해 견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