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중 ‘초판 작가의 말’을 아직 읽지 않고, 작품만을 읽기를 끝냈을 때에 막막했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내가 사람의 생명과 죽음과 회개와 용서에 대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공지영 작가는 “악몽에 시달렸고 잠을 자다가 자꾸만 깨어났다.”(355p)라고 하셨다. 황석영 소설가도 “이 소설은 나도 한복판에서 겪은 얘기이건만 읽기가 힘들고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제3판 책 뒤표지)라고 하셨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남자 주인공 정윤수 역을 맡은 내가 정말 좋아하고, 세상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강동원 배우도 JTBC News 인터뷰에서 “우행시, 촬영 당시 매일 악몽 꾸며 울다 깼다.”라고 하셨다.
그러니 나의 그 막막함은 없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었을 테다. 그래서 작품 속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소설적 장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공지영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셨을 때에 분명 소설적 장치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하셨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블루 노트의 정체가 그러하다. 남자 주인공 정윤수가 쓴 자신의 진짜 이야기가 담긴 19편의 블루 노트 중 18번째 블루 노트는 “만일 제가 죽는다면 이 노트를 읽으신 분은 이 노트를 문 모니카 수녀님의 조카분이신 문유정 씨께 전해주십시오.”(333p)라며 블루 노트가 여자 주인공 문유정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각 블루 노트의 바로 앞에 실린 명언은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마지막으로 등장인물의 세례명에도 뜻이 있다. 남자 주인공 정윤수와 여자 주인공 문유정을 이어준 문유정의 고모인 모니카 수녀님의 세례명과 정윤수의 영세명 아우구스틴에 대해 소설에서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윤수의 영세명은 아우구스틴, 젊은 그는 이교도였고, 창녀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러나 어느 날,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성서를 펴들고 그리스도교 최고의 성자가 된 성인이었다. 그리고 모니카 고모가 그 이름을 딴 모니카 성녀의 친아들이기도 했다.”(306p)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신파’라는 거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신파’는 ‘감정 과잉,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핑계 삼아 논리와 개연성을 무시하는 억지 전개 방식,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연출 방식’이다. 이 작품을 한 구절로 요약하자면,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어쩌다 보니 살인에 가담하게 된 남자와 세 번의 자살시도를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사형수 중에 어쩌다 보니 살인을 하게 되고 타인의 죄까지 뒤집어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억지 전개 방식이다. 게다가 새로 실시하는 모범 감옥으로 착각할 만큼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는 유럽의 일반 감옥을 보여주는 부분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 역시 사형 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의 가장 첫 문장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초판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나는 막막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359p)라는 부분에서 그러했다.
그제야 나는 십여 년 전의 미사 한 대가 떠올랐다. 주일에 본당에 갔는데 사회교정사목위원회의 신부님께서 파견 미사를 집행하셨다. “형편이 어려운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죄인들을 위해야 하는지 궁금한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것 역시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도로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소액이나마 사회교정사목위원회에 기부를 약 일 년 정도 했었다.
나의 블로그를 뒤져보니 그 당시 받았던 사회교정사목위원회의 소식지 ‘빛의 사람들’과 손바닥만하게 인쇄된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가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다. 작품 속 천주교 만남의 방에 걸린 그 그림 <돌아온 탕자> 말이다.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무릎 꿇은 아들의 참회’(67p). 그리고 나는 다시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하느님의 진짜 뜻은 무엇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