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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언니selfmotivator Nov 17. 2020

서막: 직장인 대학원생 투잡러

행복한 지옥

사회생활 5년 차 추석 즈음이었던 것 같다. 평범하고 모범 성실한 직장인 하루였다. 회사원 중에서도 한 조직의 임원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위치, 극비 업무 포함 만능 해결사 비서로 재직 중이었었다.


누가 비서를 선입견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함부로 대할라 치면 두 팔 걷어 부치며 비서 권익보호를 위해 부지런하게 외치고 있었다. (내 마음속 표현이 그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어금니 깨물고 웃으면서 조곤조곤...) 그렇게 묵묵히 외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던 수많은 하루 중 한 날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날도 열심히 일을 했고 아무렇지 않게 퇴근을 했던 지극히 평범한 하루 중 한 날이었다.


그런데 문득...


연차도 쌓여 5년 차 수준의  속도도 붙었겠다, 누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일 하는 방식을 터치하는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 당시 보좌했던 상사와도 1년 반 이상 함께 업무를 해오던 관계였기에, 업무는 하루하루 늘 다채로웠지만 두터운 신뢰 속에 업무 수행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분명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길고 긴 추석 연휴를 목전에 두고 든 생각은, [나는 없고 내 '상사'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아이를 보살필 때 자신은 내려놓고 아이만 쑥쑥 잘 크는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하려나.


매 년 하는 중간 인사평가에서 내 목표는 작년과 크게 다를 게 없었고, 연차가 쌓여가는데 나는 제자리인 것 같은 정체감이 심했으며, 또래 친구들은 자기 업무의 단계별로 한 단계씩 착착 성장하며 올라가는 것 같은데 나의 미래에는 그런 단계별 성장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직무가 특수한 비서직이었다 보니, 신입 때든 3년 차든 5년 차든 루틴 하게 하는 업무가 존재했고, 그것을 10년 차 20년 차에도 비서라면 응당 해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었다. 단계별 경력 성장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때 자각했던 것 같다. 맘 속으로는 다른 직장인 친구들과 비교하면 할수록 이상한 결론이 나서 짜증도 났다.


그때 선택한 돌파구가 바로 [대학원 진학]이었다. 위로 성장하는 것은 잠시 쉬어두고 옆으로 폭넓게 확장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었다. 키가 더 이상 크지 않을 것 같다면 (경력의) 살을 찌우는 방법이었다.


원서 준비, 면접 참석, 입학 오리엔테이션, 수강신청 등등 2010년 귀국 이후 5년 만에 다시 해보니 설레던 순간도 있었지만, 직장과 병행하는 대학원 생활은 정말 [행복한 지옥]이었다. 


매 순간 기회비용을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하여

선택의 기로에서 의사결정을 해야 했다. 업무를 좀 더 마무리하고 학교 수업에 지각할 것인가. 업무는 내일 일찍 출근해서 하고 학교에 정시 출석을 할 것인가. 폭우, 폭설일 때는 그냥 수업 째고 바로 집으로 퇴근해서 쉬고 싶지만 대학원 등록금액을 생각하면 그런 악천후 상황에 내가 무릎 꿇기는 싫었다. 갑자기 야근이 잡히거나, 조금 늦게 퇴근하면 러시아워로 인해 지각을 밥먹듯이 했고, 중간/기말고사/졸업시험/논문 준비/논문 발표 기간에는 밥먹듯이 휴가를 내느라 휴식을 위한 휴가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황금연휴, 여름휴가, 연말 휴가에 나는 늘 과제와 발표 준비와 논문으로 시름하고 있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으나(만성피로감)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없었던 것은, 한 번 시작한 것 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하루하루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질질 끄는 것보다 바짝 끝내는 게 더 현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또 하나는 경력의 살을 찌우는 느낌과 동시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을 때쯤에는 키도 조금, 아주 조금은 컸다는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토할 것 같을 때가 많다.;;; 하도 머리를 써서 그런지 새치 비슷한 흰머리가 엄청 많이 생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길이라 어디다가 힘들다고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속으로 혼자 삭히고 또 삭히는 게 지금도 가장 힘들지만, 내가 왜 이 길을 택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경력의 살을 찌우겠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나는 박사 수료까지 했고 박사논문을 쓰며 직업인 생활을 여전히 병행하고 있다. (어떻게 해 온 것인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맘 속에 새기고 여전히 하루하루 [행복한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내며 살도 찌우고 키도 크는 중이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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