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였다. 하얀 의상에 솜털 머리방울을 단 걸그룹이 데뷔했었다. SES라는 그룹이었다. 여성 가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그룹은 생소했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전부 내 또래에다가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 훗날 바다는 그때 요정 컨셉으로 나왔던 것에 대해 뒤늦게 사과드린다고 농담을 했지만, 그땐 정말 예뻐 보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20대 중반에 다다르자 바야흐로 걸그룹의 시대가 열렸다. 원더걸스의 중독성 쩌는 맬로디에 현혹되지 않을 재주가 없었고, 소녀시대의 파워풀한 발차기는 뭇 남성들의 심금을 몇 번이나 차고 울렸다. 그들의 성공을 참고하여 데뷔했던 걸그룹들도 각자의 매력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어갔다. 나는 대놓고 환호하지는 않았지만, TV를 돌리다 나오면 끝까지 보는 라이트팬으로 살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나 춤 실력이 과거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딱 봐도 연습을 많이 한 티가 났다. '아이돌 노래는 대놓고 듣기 쪽팔리다'는 인식에 대한 부담이 점점 줄었다. 게다가 스타일링도 한껏 과감해져 있었다. 아닌 척할 것도 없이 성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메이크업과 의상이 일반화되었다. 가끔 그런 것에 혹하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었으나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실력에 내지르는 환호만큼 그들의 예쁨에도 감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어쩔 수 없는 아재가 되었다. 고단한 생활인이 된 이후의 일상이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것이다. 몸은 늘 힘들고 회복은 느리며, 무엇보다 마음은 정체 모를 무엇에 항상 쫓긴다. 이런 변화의 연장선에 있는지 몰라도, 걸그룹도 어느 순간부터 잘 안 보게 되었다.
그 어느 순간이 언제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을 보고 즐기는 '돌'이 아닌 나와 같은 생활인으로 보게 된 시점이 아닐까 싶다. SES, 원더걸스, 소녀시대를 볼 때만 해도 그들은 완성형의 그 무엇이었다. 지구 어디에선가 걸그룹 멤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가 길거리에서 캐스팅된 덕분에 우리 앞에 나타난 사람인 줄 알았다. 연습생 몇년차하는 말이 그때도 있었으나, 그저 스토리를 입히기 위한 마케팅 수사처럼 들릴 뿐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 겪는 과정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상처 입어도, 자존감이 깎여도, 고통스럽고 불안해도, 아무것도 아닌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말이다.
그런데 아이돌이 겪는 과정은 유독 가혹해 보인다. 예능에 나와 연습생 시절을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연출된 표정 사이로 언뜻 트라우마가 지나간다.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에 자신을 던져놓고선 매일 불안해하며 살았던 시절 줄지어 나를 덮쳤던 두려움, 벼랑 끝에 발을 떨며 서봤던 사람만이 아는 절박함들. 살기 위해선 밟고 일어서야만 했던 연습생 친구들이 자신의 바람대로 하나 둘 없어질 때마다 결코 기쁘지 않았던 아이러니를 예능에 맞게 각색하는 모습은 너무도 보기 고통스럽다.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할지 짐작이 간다.
이러니 그들의 무대를 보는 나의 눈도 이제는 다른 것을 보게 된다. 15cm은 족히 넘을 만한 힐을 신고 무대 위에서 방방 뛰는 보습을 보고 있으면 발목과 무릎 연골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말도 못 하게 아플 텐데도 그들은 마치 몸의 일부인양 생글 웃으며 날렵하게 움직인다. 그 웃음은 참는 것인지 무뎌진 것인지 알 수 없게 가린다. 웃음 뒤에 있는 진심을 알 수 없어서 더 쓰리고 안쓰럽다.
10대 때부터 성대결절과 허리 디스크를 달고 살았다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아이돌의 얼굴은 여전히 앳되다. 다이어트 고난사는 그동안 많이 들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먹을 걸 가지고 가해지는 모욕과 학대 이야기는 적응이 안 된다. 탈퇴한 멤버의 사유가 거식증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철없던 시절 한때나마 그들의 마른 몸을 보고 예쁘다 칭했던 나 자신이 죄스럽다.
누군가는 말한다. 먹고살기 위해 마주치는 확률은 모두 희박하다고. 그 확률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 고단하지 않은 이는 없다고, 아이돌은 훨씬 큰 보상을 받으니 행복한 거라고. 맞는 말이다. 성공한 아이돌은 수백억 자산가가 되기도 한다. 지망생들 모두 그 가능성을 좇아 자발적으로 도전한다.
그러나 성공이 지닌 화려함의 정도를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에 집착할수록 과정과 보상의 적절한 인과관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주어지는 보상에 대비하여 적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은 어느 수준인가에 대해 세상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매년 임금 수준을 두고 줄다리기하고, 이직시장에서 사람들은 여러 조건을 맞춰본다. 격무에 시달리다 변을 당한 노동자를 두고 공분하는 것도 이 균형이 깨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을 모두 공유하고 있어서다.
99.9999%가 실패하고, 실패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10대 어린 친구들이 몸과 마음과 시간을 내놓고 뛰어드는 이곳에서 그런 균형을 따져 묻는 건 결코 부당하지 않다. 성공에 대한 보상이 엄청나니 그 과정이 아무리 혹독해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잔인하다. 성공의 빛에 가려져있어도 이 친구들이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는 결코 증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남겨진 삶이다.
기왕이면 무대가 모두에게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한국 아이돌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마당에 이 시스템의 불완전한 면을 지적할 식견이 내겐 없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효율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가혹한 과정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을 갈아 넣은 결과물에 더 이상 웃을 수가 없다. 부디 어린 친구들에게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