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애정하는 공간이 하나 있다. 전망이 트인 휴게실 맨 구석자리다. 오전 내내 회의다 보고다 사람에 치인 날이면 이미 하루치 에너지가 다 소진된다. 그럴 때면 점심을 무조건 혼자 먹어야 한다. 근처 식당 중에서 팀원들이 잘 가지 않는 식당에 홀로 앉아 빠르게 점심을 해결한 뒤, 아직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들어간다. 그리곤 그 자리에 홀로 앉아 바깥 전경을 둘러본다. 혼자의 연속이다. 그래야 펼쳐 놓았던 온갖 센서가 꺼지고 열이 식는다. 이렇게 충전된 에너지가 있어야지만 오후를 버틸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사람과 접촉하는 건 노동이다. 회의나 보고처럼 굳이 일로 하지 않더라도 사람과 만나는 자리는 늘 필요 이상의 압박이 가해진다.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모처럼 설레는 소개팅 자리도 끝나고 돌아오면 살짝 현기증을 느낀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이상으로 말을 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받으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당연하게도 어릴 때부터 불편을 많이 겪었다. 초등학교 때 떠밀리듯 반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반 친구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애꿎은 엄마를 졸라 담임 선생님께 "우리 아들이 못 하겠대요"라는 일종의 '하야선언' 비슷한 말을 전달하기도 했었다. 나의 중도하차가 충격이었는지 엄마는 그후로 틈만 나면 내 성격을 고치길 원했으나,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엄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사교성이 없어서 세상 어찌 살려고 그러냐는 엄마의 핀잔에 늘 "엄마 닮아서 그래"라며 책임을 떠넘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숙제를 미루고 있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죄책감은 쉽게 자학으로 이어졌다. 세상에는 나 같은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 따로 없어 보였다. 굳이 찾자면 사교성이 부족하다, 사회성이 떨어진다, 붙임성이 없다 정도였다. 고유의 특징이나 가치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주류, '성격 좋다' '사람 좋다'는 편애를 받으며 사는 이들에 비해 무엇인가 결핍되고 부족하다는 뜻을 포함하는 말이 전부였다. 그럴 때마다 나를 누군가에 기대어 규정되어지는 사람으로 인식했고, '좋은 성격'의 반대인 '나쁜 성격'이라고 나 스스로를 이름 지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최근 변화가 생기고 있다. MBTI가 사람의 성격을 구분하는 도구로 유행하면서부터이다. MBTI의 가장 고무적인 점은 16가지 유형의 성격을 평면에 펼쳐놓고 특성 하나하나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어떤 대상에 종속되어 있던 세입자에서 16개 주체가 각자 보금자리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건물주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도 'I'라는 건물 겸 이름표를 갖게 되었다. 그 이름표가 너무 근사해서 MBTI의 비적합성에 대한 비판 정도는 가볍게 흘려듣는다.
E는 사람과 있을 때 활력을 갖는 반면 I는 혼자 있어야만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다는 설명을 보고 전율을 느꼈었다. 그동안 사람을 만날 때면 나의 낯가림과 금세 바닥나는 기력 때문에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수많은 자기방어의 말들을 늘어놓아야만 했다. 주로 원래 붙임성이 없지만 결코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신 앞에 있는 이 순간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설득시키기 위한 말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고맙게도 저 대중화된 이름표에 기대어 스스로를 I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호감/비호감의 선택은 상대에게 맡긴다. 설령 상대방이 마음에 맞지 않아 해도 그저 취향의 차이일 뿐 나의 인격에 대한 호불호가 아님을 쉽게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세상의 일방적인 편애로부터 조금은 초연해진 듯하다.
미정 : 편하지. 나무, 바람, 돌은 우리를 거슬리게 하지 않잖아.
구씨 : 사람들 많은 데서는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 커피숍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도 거슬려.
미정 : 우리는 그냥 인간을 싫어하는 듯.
구씨 : 나만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 끝난 '나의 해방일지'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다. 라디오 혼자 듣는 아재처럼 저 대목에서 "나도 그래"라고 대답했다. 드라마 주인공의 입에서 인간이 싫다는 말을 듣다니, 1회에 요절하는 주인공만큼 생소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늘 인싸들이지 않았나. 인간관계에 능수능란하고 많은 이들의 협력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그들을 보며 나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상의 중심에 서는 날이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타인들에게서 자신의 세상으로 해방되길 바라는 극 I형 인간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관계에 속박되어 살고 있었다는 말인가.
타고난 조건이 다 다르듯 각자 담을 수 있는 관계의 양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를 계속 확장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어떤 이는 소수의 관계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식에 익숙하다. 어떤 것도 이상하지 않고, 각자 존중받아야 할 개성이다. 외롭지 않냐고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물론 외로움을 모르고 살지는 않겠지만, 분에 넘치는 관계를 채우고 사는 데서 오는 힘겨움에 비하면 오히려 환영할 수 있다. 그저 날 추앙해주는 구씨 하나만 있어도 최소한 인간관계에서는 행복할 수 있는 구색은 다 갖춘 셈이다.
드라마 덕에 굳이 나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더 줄어든 것 같다. 한동안은 '해방일지 쓰는 염미정이랑 비슷한 성격이에요'라고 하면 다들 알아듣지 않을까. 아무튼 편하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