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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Jan 11. 2021

[Review] 애비 찾아 삼만리, 망해도 괜찮아요

영화 <애비규환> 리뷰

   


2009년 방영된 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 “가족 간의 사랑과 헌신, 끈끈한 혈육의 정”이라는 “우리 한국의 고유한 가치”를 표방하며 제작된 이 드라마는 한 화에만 ‘핏줄’이라는 단어가 많게는 열 번에 가깝게 등장하며 ‘핏줄 드라마’, ‘에덴의 핏줄’ 등의 별칭(?)을 얻었다. ‘내 핏줄’이라는 이유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가족이 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스토리는 학연, 혈연, 지연으로 돌아간다는 한국 사회의 시청자들에게도 반감을 샀고 결국 <에덴의 동쪽>은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개연성 없는 막장 드라마라는 혹평을 얻으며 종영했다. 유교, 뿌리, 핏줄… 여전히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단어들은 필자를 비롯한 90년대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유교 사상에 기반한 가부장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여성을 지칭하는 ‘유교걸’이라는 자조적인 밈(meme)으로 승화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최하나 감독의 <애비규환>의 주인공인 토일(정수정)은 90년대생 여성의 대변인과도 같은 캐릭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토일은 과외 제자이자 남자친구인 호훈(신재휘)에게 정철의 ‘속미인곡’을 가르치며 사랑을 충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교의 폐해라고 말한다. 그날 둘은 사랑을 나누고, 대학생 토일의 인생에 임신, 출산, 결혼이라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등장한다. 임신, 출산, 결혼, 그리고 아빠. <애비규환>의 스토리를 이루는 이 단어들은 때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마구마구 퍼붓는 단어들이다. 임신과 출산이 여자라면 모두 거쳐 가야 할 아름다운 과정으로 그려지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2020년에 임신과 출산은 곧 경력단절-꿈의 포기, 그리고 끝없는 가사노동의 시작으로 가는 지름길과도 같다.


그러나 주인공 토일은 결혼과 출산이라는 중대사 앞에서 그리 겁먹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영화에서 생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신 5개월 뒤, 토일은 엄마와 아빠 앞에서 볼록하게 나온 배를 당당하게 공개하며 호훈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토일에게는 로스쿨에 입학해 능력 있는 법조인이 되고 자신을 우러러보는 호훈과 함께 가정을 꾸린다는 장밋빛 꿈이 있다. 하지만 대학생 딸이 다짜고짜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며 볼록한 배를 공개한 얼토당토없는 상황에 부닥친 부모님에게 그 계획이 곱게 들릴 리가 없다. 결국 토일은 부모님과의 말다툼 끝에, ‘넌 대체 왜 그러니?’라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아빠를 찾아 떠난다. 희미한 기억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토일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 친아빠를 굳이 찾아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핏줄 찾기 모험의 끝에서 토일은 무엇을 얻게 될까?



토일이 친아빠를 찾으러 떠난 곳은 대구다. 대구에는 유교 사상을 의인화한 것 같은 조부모님이 있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가 있고, 엄마 선명(장혜진)과의 추억이 담긴 수성못이 있다. 토일은 아빠가 기술가정 선생님이었다는 단서만 가지고 최씨 성을 가진 기술가정 선생님을 찾아다니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 의외의 경로를 통해 아빠를 만난다. 하지만 친아빠를 만나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실망한 토일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애비인 호훈이 사라지는 황당한 상황에 처한다. 첫 번째 핏줄 찾기가 다소 싱겁게 끝나자마자 다시 두 번째 핏줄 찾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하지만 토일과 토일의 엄마 선명, ‘현아빠’ 태효(최덕문), 이번에는 자기가 토일을 찾아온 ‘구아빠’ 환규(이해영)까지 온 가족이 나선 두 번째 핏줄 찾기 역시 독서실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먹고 기절해버린 호훈을 발견하면서 싱겁게 끝난다.


영화의 제목은 <애비규환>이고, 크게 각각 토일의 친아빠 환규와 토일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아빠가 될 호훈을 찾아 나서는 두 가지 스토리로 구성되지만 영화에서 애비를 찾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복잡하고 유쾌한 서사의 중심에 있는 토일이 겪는 감정 변화나 가족과의 갈등 같은 것들이 더 두드러지는 토일의 성장담에 가깝다. 토일은 임신한 사실을 5개월씩이나 숨기고 한문 교사인 아빠와의 말싸움에서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당차고 똑똑한-그리고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여성이지만 환규를 찾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남의 집 ‘애비’들을 들쑤시며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친아빠에 대한 실망, 그리고 호훈의 실종은 토일에게 ‘이 결혼이 망하면 어쩌지?’하는 공포로 다가온다. 소신 있고 당당한 토일이지만 결혼이라는 현실적 문제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진짜 공포’다. 내적 갈등이 폭발한 토일은 가족들과 배드민턴 네트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며 급기야 결혼하지 않겠다고 소리친다. 애비를 찾으려다 머리만 더 복잡해졌으니, 토일의 애비 찾기 모험은 망한 셈이다.


그런 토일의 마음을 다잡는 건 ‘망해도 완전히 망한 건 아닌 것 같다’는 엄마 선명의 말이다. 이미 결혼, 임신, 출산, 이혼과 재혼까지 토일이 겪지 않은 것들을 모두 겪어 본 선명은 지레 겁먹고 한발 뒤로 물러난 토일에게 ‘망해도 괜찮다’는 말을 전한다. ‘망해도 괜찮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영화 속의 토일, 그리고 ‘망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다. 필자 역시 돌이켜보면 별것도 아닌 일에 ‘망했다!’고 소리쳤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마구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망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지는 법이다.



토일의 애비 찾기 여정의 끝에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거나, 애아빠가 도망친다거나 하는 극적인 사건은 없다. 친아빠 환규는 분명 토일과 닮은 구석이 많지만, 토일은 환규에게서 마음에 드는 구석만 닮겠다고 다짐한다. ‘끈끈한 혈육의 정’이고 뭐고, 토일은 혈육과 양육자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대망의 결혼식 날 현아빠도 구아빠도 아닌 엄마 선명과 함께 입장하는 신부 토일의 모습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아빠와 15년간 자신을 키워준 새아빠 중 누구와 입장해야 할 지 고민하는 진부한 과정은 토일에게는 불필요한 일이다.


이 영화는 90년대생을 위한 성장담이다. MZ세대 등의 단어로 한 세대를 묶어 일반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콕 집어 90년대생을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토일 역을 맡은 정수정의 존재감 때문이다. 90년대생 중 2009년 데뷔한 걸그룹 f(x)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거다. 그중에서도 크리스탈은 나를 비롯한 10대 여학생들의 휴대폰 바탕화면에 자주 등장한, 10대 소녀들이 열성적으로 사랑한 멤버였다. 10대 소녀들의 우상이자 워너비였던 정수정이 연기하는 토일이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다소 요란한 방식으로 척척 풀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녀와 함께 성장한 여자들에게 그 자체로 힘이 되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났던 크리스탈이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토일이라는 멋진 캐릭터로 변신했듯이, 토일의 인생도 상상도 못 한 방향으로 흥미진진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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