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李穀), 「영사(詠史)」, ‘왕상(王祥)’
65. 왕상의 충정
安有三公輒拜人(안유삼공첩배인) 어찌 삼공이 함부로 남에게 절을 하랴
眼中曾不見何荀(안중증불견하순) 하증과 순의는 눈에 봬도 않았다네.
一言曹室九金重(일언조실구금중) 한마디로 위나라 왕실 권위 중해졌으니
相國雖尊亦魏臣(상국수존역위신) 상국 비록 존귀해도 그도 위의 신하일 뿐.
이곡(李穀), 「영사(詠史)」, ‘왕상(王祥)’
[평설]
이 시는 왕상의 곧은 절개와 높은 충정을 썼다. 1, 2구는 왕상의 강직한 태도를 보여준다. 당시 삼공의 자리에 함께 있던 하증(何曾)과 순의(荀顗)와 달리 왕상은 상국인 사마염에게 홀로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위나라 조정의 위엄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3구의 '구금(九金)'은 하우씨(夏禹氏)가 구주(九州)의 쇠붙이를 모아 주조했다는 구정(九鼎)을 가리킨다. 구정은 삼대(三代)를 거치면서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보물로 여겨졌다. 이 구절에서는 조씨(曹氏) 왕실이 세운 위나라의 정통성과 권위를 의미한다. 왕상이 한마디 말로써 위나라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예법을 준수한 것이 아니라, 위나라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4구는 이러한 맥락을 부연한다. 사마염이 제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위나라의 신하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 이 시의 깊은 의미는 왕상이 단순히 예법을 지킨 것을 넘어선다. 당시 위나라는 사실상 사마씨 가문에게 실권이 넘어가서, 곧 사마염에 의해 진나라가 건국될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왕상은 끝까지 위나라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켰으니,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 시에서 '절'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권력 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증과 순의가 이미 사마염에게 절을 했다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에 순응한 것이다. 반면 왕상이 사마염에게 절을 거절한 것은 이런 흐름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의 추가 기울면 원칙과 절개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겁을 처신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한다. 이 시는 불의한 권력 앞에서 신하가 어떤 자세를 보여주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