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 「영사(詠史」, ‘조지(棗祗)’
67. 조지(棗祗)의 공적
擧義誅殘號爲民(거의주잔호위민) 거병하여 폭정 물리치며 백성 위해 외치지만
民窮相食只風塵(민궁상식지풍진) 백성 서로 잡아 먹을 만큼 궁핍하여 떠돌아 다니네.
首陳農業基曹室(수진농업기조실) 농업을 첫째로 삼아 조씨 기반 세웠으니
須信袁孫無此人(수신원손무차인) 원소와 손권에게는 이런 인재 없었으리
이곡, 「영사(詠史」, ‘조지(棗祗)’
[평설]
이 시는 조조 정권의 기틀을 확립한 조지의 업적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조지는 후한 말 혼란기에 진류 태수(陳留太守)를 거쳐 동아 영(東阿令)을 역임하며 조조의 정권 강화에 기여했다. 특히 한호(韓浩) 등과 함께 둔전제(屯田制)를 적극 주창하여 정책화했는데, 시인은 이러한 조지의 실용적 정책과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대비하며 그의 공적을 부각시켰다.
1, 2구는 당시 시대상의 모순을 보여준다. 각지의 군웅들은 의병을 일으켜 폭정을 타파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말은 그럴듯했으나 정작 백성들의 삶은 참혹했다. 전란으로 인한 극심한 궁핍 속에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그들이 내세운 '위민(爲民)이란 말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다.
3, 4구는 조지의 뛰어난 정견(政見)을 조명한다. 그는 농업이 국가의 근본임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고, 이를 실질적인 정책으로 구현해냈다. 특히 여포의 난으로 연주(兗州) 전역이 조조에게 등을 돌렸을 때도, 조지는 동아를 굳건히 지키며 군량미 조달이라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가 주창한 둔전책은 조조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는 민생 안정이라는 치국의 근본을 실현한 것이었다.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당대의 실력자였던 원소와 손권을 언급하며 조지의 역량을 강조한다. 이들 유력한 군웅들에게 조지와 같은 혜안을 지닌 인재가 없었다는 평가는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순히 인재 등용의 실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민생이라는 국가 경영의 근본을 놓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군사력과 정치적 책략에만 의존해서는 진정한 천하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깊은 통찰을 시인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난세를 다스리는 방략에 대한 본질적 통찰을 담고 있다. 백성을 위한다는 정치적 수사나 화려한 구호가 아닌, 민생 안정을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이 바로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조지의 사례를 통해 민본이야말로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가 지향해야 할 근본 가치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다. 정치는 결국 화려한 수사가 아닌 민생 안정이라는 본질에서 그 가치가 입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