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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수 Sep 23. 2020

옷에 비친 나의 소망

띠어리, 짐머만 그리고 잠옷 바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나의 정체성

나는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랐다. 국어 선생님이자 연구부장이었던 우리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 항상 숏커트 머리를 고수하며, 바지 정장을 자주 입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엄마를 “호수 엄마”가 아닌 “부장님"이라고 불렀다. 은퇴를 한 지금도 친척들은 성이 구 씨인 우리 엄마를 “구 선생”이라 부른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팬시 문방구에는 옷 입히기 스티커를 팔았다. 여자 사람 그림이 있고, 그 위에 마음에 드는 옷을 스티커로 붙였다 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친구들은 치마가 풍성한 드레스, 노란색이나 분홍색 옷을 입혔지만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옷은, 하늘색의 바지 정장 한 벌이었다. 구 선생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나는 항상 여자 정장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세인트 로랑의 르 스모킹 슈트 까지는 아니더라도, 90년대 캘빈클라인 정장을 입은 앨리 맥빌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은 앨리처럼 신경질적이고 내 멋대로 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에겐 예쁜 원피스를 입은 여자보다, 바지 정장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여자들이 백 배 천 배는 멋져 보였다.


그러던 작년 시월, 학회 참석으로 시드니로 출장을 갔었는데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은 공교롭게도 백화점 옆에 있었다. 산책 겸 돌아보던 찰나, 오 마이 갓, 띠어리 매장에 그 어린 시절 스티커와 너무나도 흡사한 정장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무엇에 이끌린 사람처럼, 나는 그 옷을 입어보았다. 아! 핏 하며, 울 소재의 퀄리티하며, 안감 처리까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담아왔던, 딱 그 정장이었다. 가격표를 본 나는, 애써 놀라지 않은 척하며 “아, 좀 더 보고 올게요, 감사합니다" 하고 쿨한 척 매장을 떠났지만,  그 슈트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theory

결국 멜버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나의 손에는 띠어리 슈트케이스가 들려있었다. 시드니 마지막 날 다시 돌아가서 결국은 산 것이다. 내가 이걸 입을 일이 언제 있을까? 싶었지만 "Don't dress for the job you have, dress for the job you want" (지금 가진 직업이 아닌, 가지고 싶은 직업을 위해 옷을 입어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이 캐주얼한 호주에서 내가 어느 날 정교수가 된다고 해도 위아래로 정장을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뭐, 다가오는 친구 조와 엠마의 결혼식 때라도 입고 가지 뭐라는 생각으로 샀다. 원피스보다 바지 정장이라니, 정말 쿨하지 않나?


코로나로 조와 엠마의 결혼식은 취소가 되었고, 이 정장은 태그도 떼지 않은 채 내 옷장에 걸려있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나의 옷 취향에 변화가 불기 시작했다. 꽃무늬 원피스가 너무 예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호주에는 짐머만이라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있는데, 개인 요트가 즐비한 해변가 동네에 살고, 태양에 살짝 그을린 피부를 가진 금발의 호주 여자들이 자주 입는 라벨이다. 호주에 사는 10년 동안 매장 앞을 지나가도 별로 눈이 안 가던 그 옷들이, 요새는 내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어떤 옷들은 너무 예뻐서 약간 화가 나기도 한다. 이 마음은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 너무 예뻐, 짜증 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 옷들.


Zimmermann 2021 S/S


잘 입지도, 벗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생긴 옷, 촘촘한 레이스에 실크 100%, 과장된 소매에 실용성은 떨어지고, 꽃무늬에 색은 아주 화려하다. 저걸 어떤 날 입지 싶지만, 어떤 운 좋은 여자들은 아무 날도 아닌 날에 친구들과 긴 점심을 먹기 위해 입을 것 같기도 하다.


직장인 여성의 삶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탓일까. 그놈의 “커리어우먼” 삶, 온종일 울리는 이메일, 시간낭비 회의들,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데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나날들, 내가 일하려고 태어났나 생각이 들게 하는 나날들을 너무 많이 보낸 탓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엄마를 포함한 앞서 살아온 여자들의 그 정장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입었던 갑옷이었을까?


여성이 드디어 직장에서,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무슨 퇴보적인 생각이냐,라고 하겠지만 나는 강할 필요 없는 여자들이 입을 수 있는 옷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약할 수 있다는 건 특권이라고 느껴졌다. 국민들의 현실과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난하면서도, 내심 나도 가끔은 세상 물정 모르고 오후 3시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직장생활에 지친 나에게 짐머만의 옷은 작은 투정이자 반항인 걸까.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장면

그런데, 내가 저런 옷을 “약한 여자” 가 입는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감히, 다른 이를 약하다고 할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는다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는다고, 여성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약한 거면 그게 진짜 남성성이 우월하다고 주장해버리는 셈이 아닌가. 물론 그래, 처음부터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게 사회와 환경이 부여한 것이라고 치더라도.


내 취향의 급격한 변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했지만, 일단 최근 나의 허세는 띠어리 대신 짐머만의 온라인 샵을 구경하는 것으로 충족이 되고 있다.


사실 코로나 봉쇄 때문에 갇혀있는 지난 6개월, 내 드레스코드는 거의 매일 스웨터와 잠옷 바지이다. Zoom을 통해 나를 보는 동료들,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어저께도, 그저께도 입었던 잠옷 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을. 하긴, 그러고 보니 잠옷 바지만큼 내 정체성과 가까운 옷도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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