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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May 04. 2024

중1이야기ㅡ영어영재원

4년동안 영재원 다니면서 행복했다.

 영재원을 도전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글이라 아이가 쓴 글을 공유합니다.





   내가 영재원에 처음 도전한 나이는 2학년, 만 8살 때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면접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면접문제를 들었을 때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겨우 몇십 초 답변을 얼버무리고 끝난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해는 면접 전형에서 아쉽게도 불합격했다. 어린 나에게는 아주 쓴 패배였고,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실패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다음 해에 영재원에 또 지원했고, 3학년으로 변하면서 얻은 지식을 잘 활용하여 다시 한 번 자소서와 면접 전형에 도전했다.


그 결과, 나는 두 번째 시도만에 영어영재원에 합격하게 되었다! 2학년 때 맛본 쓴맛을 완전히 압도하는 행복이었고, 나는 4학년 때부터 영재원의 학생으로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내가 그 해에 영재원에 합격하게 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원격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영재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의 사진도 나오고, 그 전 해에 영재원에 갔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영재원 학생으로서의 스타트를 온라인 미팅으로 끊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원격으로 배우면서 컴퓨터로 프레젠테이션 만들기, 문서 작성하기, 영상 제작하기와 같은 기술들을 더 접하게 되었고, 그 점은 원격수업의 장점인 것 같다.


화상으로 하다보니 친구들과 영재원에서 직접 만나 연극을 연습을 한다거나 무대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은 할 수 없었으나, 나와 비슷한 성향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


몇 년동안 원격수업의 불편함을 겪고 나니 진짜로 영재원에 갈 수 있는 현재의 날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또한 좋은 것 같다.

   4학년 때 한번 영재원의 재미를 느끼고 나니 중독된 사람처럼 계속 자소서 서류를 제출하게 되었다.


영재원에서 지금까지는 없었던 희열과 학구열이 불타올랐고, 학년이 올라가면 배울 수 있는 게 달라지니 언어학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었다.


그리고, 계속 도전하다보면 언젠가는 진짜 영재원의 발표 무대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엄마, 동생과 함께 매년 자소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준비했다. 계속 하다보니까 나만의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았고, 자소서 작성과 면접에 대한 두려움도 점점 사라졌다.


두려움을 자신감과 굳은 의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대신해주었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매년 결과도 좋았다.


   내가 가장 즐거웠던 시기는 6학년 1학기이다. 6학년 1학기 때는 코로나 팬데믹이 조금 나아지는 추세였기에 처음으로 영재원에 가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2주에 한번 영재원에 올 때마다 캠퍼스에 빼곡히 심어진 나무들의 색깔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고, 대학교 뒤 올레길도 너무 상쾌하고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를 행복하게 해줬던 것은 산출물 팀원들이었다. 나 포함 다섯 명이 한 팀이었는데, 그중에는 5학년 후배들도 두 명이 있었다.


산출물 주제로 연극을 준비하면서 영상 제작, 프레젠테이션 자료 제작, 대본 작성, 녹음 파일 정리 등 할 게 많았는데, 내가 힘들지 않게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하는 상황인 만큼 부담이 컸지만, 팀과 긍정에너지를 나누며 꾸준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팀원 중 5학년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옆에서 꿋꿋이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6학년 1학기 산출물 당일날이 찾아왔다.그런데, 아주 긴박하고 당황스러운 사건이 생겼다.


내가 책임지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소품을 집에 깜빡하고 놔두고 온 것이었다! 나는 너무 속상하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거의 울 것 같은 기분이었고, 엄마께서 바로 집으로 출발하셔서 다행히도 우리 팀의 차례가 오기 전에 준비를 잘 할 수 있었다.


그 때 엄마께서 영웅적인 행동을 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발표를 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영재원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겪게 되니, 더욱 더 영재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보람차고 행복해진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영재원에 애착을 가지게 된 이유가 또 있다. 학교에서는 아무리 내가 원한다고 해도 영어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영재원에서는 언어 장벽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친구들과 한글,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고, 우린 모두 두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


“I really don’t think you should add that to the script. 이 상황이랑 안 어울려.”

“그런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하려면 있는 게 낫지 않나? I don’t know… I’ll come up with another ment then.”

“Good. 차라리 그것보다는 이게 나을 듯.”

“오. 나쁘지 않아. Oh my gosh, I’m so nervous about the professors’ comments!”

“It’s okay. 열심히 했으면 됐지, 뭐.”


이런 식으로 영어와 한글이 오락가락 하는 대화를 영재원에서는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학급이 3개가 있는데 선배와 후배 사이에 거리감이 일반 학교보다 적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인 나도 4, 5, 6학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아이디어를 많이 나눌 수 있었으며, 산출물을 할 때 어린 친구들의 창의적인 모습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4학년 중에서 나처럼 외교관이라는 진로에 관심이 있는 아이도 있고, 나처럼 엉뚱하지만 해야 할 때는 진지하게 리더로서의 역할을 맡는 아이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매년 다른 학년들과의 교류를 더 활발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영재원에 봉사를 하러 오시는 고등학생 멘토분들도 계신다.


나보다 고등 입시를 조금 더 일찍 겪으신 분들이셔서 내가 멘토들로부터 배울 점이 매우 많고, 그들은 나와 같은 초등학생, 중학생 멘티들을 돕기 위해 항상 나서주신다.


대학 입시 준비를 하는 것도 바쁘실 텐데, 영재원까지 와서 우리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해주시는 멘토 선생님들 덕분에 나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겠다는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된다.



   영재원은 나에게 잊지 못할 많은 추억들을 안겨 주었고, 그 추억들은 내가 미래에 해외를 나가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떠올려보면서 현명한 선택을 하게 도와줄 가이드북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영재원에서 배운 것들을 평생 사용할 것이고, 영재원에서 만난 많은 인연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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