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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담 Nov 01. 2023

전업주부 10년,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번쩍 눈이 떠졌다. ‘설마 알람 소리를 못 들었나? 몇 시야 몇 시?’ 머리맡을 더듬어 재빨리 전화기를 찾아들었다. 새벽 4시 45분. 50분에 맞춰 두었는데 눈이 떠져버렸다. 날려버린 5분이 아까워 다시 누울까 고민하는 사이 곧 다시 알람이 울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대충 세수를 하고 곤히 자는 둘째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운다. “OO야 일어나~성당 가야지~~.”      


성당에서 복사로 봉사를 하고 있는 두 아이들 덕에 한 달에 5~6일은 반강제 새벽 모닝이다. 비몽사몽 간 미사를 마치고 와 곧장 아침을 준비하고 두 아이의 등교를 돕고 두 차례 셔틀까지 마치고 돌아오면 9시도 안 돼 하루에 쓸 에너지가 거의 빠져나간 기분이다. 식탁에 남은 음식들을 대충 구겨 넣으며 바로 2차 전쟁에 돌입한다. 빛의 속도로 빨래를 세탁기에 던져 넣고 설거지를 하고 방마다 남은 전쟁의 잔해들을 쓸어 담고 청소기를 돌리고…하, 그나마 남아있던 에너지도 다 써버린다.    


어쩌다 일정이 있어 씻고 나가야 하는 날이 아니라면 다음 코스는 물을 것도 없이 침대였다. 게다가 오늘처럼 새벽어둠을 깨워 이른 아침을 시작한 날이면 다이빙하듯 침대에 빠져드는 게 당연했다. 스마트폰을 붙들고 전 세계를 항해한다. 오늘의 뉴스에서 시작해 드라마 정주행도 바쁘다. 교육 정보를 얻어보겠다며 인스타그램을 기웃거리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훌쩍이고 말이다. 버리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오후의 육아전쟁에서 쉬이 꺾이지 않으려면 휴식은 필수였다. 내겐 이게 영양제라 믿었다.      




그런 나에게 요즘 새로운 영양제가 생겼다. 침대 대신 딸아이 방문을 여는 것이다. 주인 없는 사춘기 아이 방에를? 간 큰 엄마인가? 아니다. 그 방에는 오래된 피아노 한 대가 있다.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서듯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피아노 앞에 앉는다. 딸이 연습하던 교재 더미 속에서 한 권을 끄집어 내 펼친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굳어버린 손가락에 최대한 느낌을 실어 이내 연주 삼매경에 빠져 들어간다.     


자주 조율을 받지 않아 간간히 잡음이 섞여 나오는 이 피아노는 내가 9살 때 부모님이 큰맘 먹고 마련해 주신 것이다. 당시에도 유행했던 예체능 사교육 열풍에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꽤나 소질을 보이며 4년을 열심히 배웠다. 엄마에게 어떤 욕심이 있으셨던 걸까? 이후 개인과외라는 나름 큰 투자까지 해주셨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10대 소녀는 점점 흥미를 잃어갔고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이후 피아노는 제대로 뚜껑도 열리지 못한 채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딸아이가 피아노를 시작한 6살에야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고 15살인 지금까지 아이와 함께 해 오고 있다.     


나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피아노였지만 수년간 나에게는 덩치 큰 가구 중 하나였고 그저 아이의 피아노였다. 그러던 작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아이가 등교한 후 청소기를 밀며 방안에 들어섰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심난한 풍경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주 폭탄을 맞았네 맞았어!”

“쓰레기통은 폼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어지럽힐 수 있노?” 

혈압이 오르면 더욱 진해지는 사투리로 듣는 이 없는 허공에다 씩씩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참을 인’을 새겨가며 주섬주섬 정리를 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열려 있는 피아노 뚜껑과 딱 걸려 부딪히기 좋게 밀어 넣지 않은 피아노 의자가 심기를 건드렸다.

 “먼지 들어가니까 닫으라고 했잖아 쫌”을 외치며 의자부터 밀어 넣는데, 순간 낡아빠진 피아노 책이 눈에 들어왔다. 30년 전 내가 썼던 교재다. 대물림할 생각으로 두었던 건 아닌데 이 유물 같은 책들을 지금 아이가 배우고 있다. ‘Beethoven’ 이라고 써져 있는 책을 펼쳐보았다. 한 악장 번호 옆에 ‘4/19’ 연필로 내가 배웠던 날짜가 표기되어 있었다. 당시 선생님이 표시해 준 기호들이나 주의해야 할 포인트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당시 열정을 품고 연습했던 모습이 살짝 그려졌다. 그리고 이끌리듯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자세를 가다듬고 손을 건반에 올려놓았다.     

더듬더듬, 천천히 악보를 읽으며 쳐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들어줄 만큼 연주가 되는게 아닌가? 슬로 모션을 걸어 놓은 것처럼 느렸지만 한 페이지 정도를 끊어지지 않고 연주해 냈다. 순간 가슴이 콩닥 거렸다.

“우와, 이걸 쳤다고 내가?” 

감탄인지 의아함인지 모를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쌓여 있던 다른 악보집들을 마구 뒤적거리며 그 자리에서 한 시간 이상을 연주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다음 부분을 연주할 수 있는 곡도 있었다. 놀라웠다. 무언가 벅찬 기분이 밀려왔다. 그때는 그리도 싫어서 그만둘 궁리만 했었는데. 성인이 되었을 때는 조금만 더 배워둘 걸 하고 후회만 했었는데. 아직 손이 기억하고 내가 기억하고 있었다니.   

   

연주를 해 낸 손가락 보다 더 신기한 건 가시지 않는 흥분이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설렘과 뿌듯함인지. 감흥이 사라질까 조심스레 일어나 피아노 뚜껑을 덮고 하다만 아이방 청소를 마저 했다. 잔소리는 진작에 쏙 들어가 버렸다. 침대에 널려있던 옷도 예쁘게 개켜 얌전히 놓아두고 방을 나왔다.    

  

그날 이후 수시로 아이방을 드나들었다. 식사준비를 하다가도, 빨래를 전해주러 갔다가도, 둘째를 데리러 가기 전 5분, 10분. 토막 시간이지만 진정 힐링의 순간이었다. 덕분에 아이와 눈 마주치는 시간도 늘었다. 침대에 누워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아이에게 다른 때 같으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며 미간 주름부터 보여줬겠지만 “엄마 피아노 조금만 쳐도 될까?” 물어본다. 잔소리 대신 생각지도 못한 세상 상냥한 표정에 아이도 “어~해도 돼~.” 내쫓지 않는다. 지나가며 던지는 “좀 늘었네~.” 하는 중딩의 후한 칭찬 세례는 덤이었다.   

  



전업주부로 산 지 10년. 매일 다를 것 없는 살림을 살아내는 것이 때로는 버겁고 힘에 부쳤다. 잘해 보고자 했던 초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매일같이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를 묻는 아들에게 대답 대신 보내는 눈빛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평화로운 날이 감사하면서도 설렘도 기대도 없는 일상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마저 들었다. 우연히 다시 만난 피아노는 그런 내게 작은 구멍을 내주었다. 답답한 실내를 환기하려 창문을 살짝 연 것처럼. 이제 “오늘 저녁 메뉴 뭐야?”라고 묻는 아들에게 “뭐 먹고 싶어?” 웃으며 물어볼 수 있다.  

    

피아노를 다시 치며 느낀 기쁨과 힐링의 기분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다. 곧 한계를 만나 여기까지인가 보다며 그만둘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알아챘던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설레었고 벅찼고 힘이 되었고 더불어 착한 엄마가 되었다. 


살림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길 참 잘했다고. 



(이미지 출처: 메인 사진  UnsplashAndrik Langfield/ 본문중 사진 UnsplashVitae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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