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문화유산 탐방기]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
주소: 충북 청주시 상당구 성내로124번길 14 (산성동)
축조: 삼국시대에 처음 짓고, 조선시대에 고쳐 지음
탐방 순서: ①성내방죽 → ②동장대 → ③남문 → ④서문 → ⑤동문 → ⑥서문
탐방 날짜: 2024년 1월 21일
▲ 다음 지도 서비스 캡쳐 후 디자인 Ⓒ박배민
요즘 내 짝꿍은 한창 운전 연수에 몰두해있다. 올해는 제대로 운전을 익히겠다는 각오로 매주 연수를 나서고, 나는 그 옆에서 코치를 부탁 받았다. 코치를 맡으면서 얻는 혜택은,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문화유산에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엔 조금 멀리 가보자!’라는 짝꿍의 말에 오늘의 탐방지는 ‘청주 상당산성’으로 낙점했다.
▲ 미호문(서문)에서 바라본 북쪽 길. Ⓒ박배민
청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 봤다는 산성이지만, 청주와 인연이 없던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청주 상당산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재미있다. 백제는 옛 청주를 상당현이라고 불렀고, 상당산성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단다. 그러니까 ‘청주 상당산성’은 마치 '역전 앞', '동해 바다'처럼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다.
상당산성은 전체 면적이 70만㎡ 정도 되는데, 경복궁의 2배가 조금 안 된다고 보면 쉽게 감이 잡힌다. (경복궁의 넓이는 약 43만㎡ 이다.) 둘레는 4.1km 정도니까 광화문에서 남영역까지 걸어가는 딱 그 정도 거리다.
상당산성의 첫인상은 예상과 너무 달랐다. 방문 전 기대했던 모습은 조용하고 사람의 발길이 드물게 느껴지는 산성이었다. 그러나 갑진년(2024) 정월의 어느 일요일, 상당산성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상당산성은 마치 남한산성의 작은 버전 같았다.
▲ 방죽 반대편에서 본 식당가와 버스 정류장 Ⓒ박배민
일단 차량이 가득했다. 방죽 옆 통행로까지 주차로 만원이었다. 일요일 점심시간, 젊은 사람보다는 중장년 부부와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더 많았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님의 모습도 왕왕 눈에 띄었다.
성 안에는 여러 식당과 카페가 밀집해 있었고, 심지어 청주를 오가는 시내버스도 존재했다. 상당산성은 존재감 없이 스러져가는 유적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였다. 마치 남한산성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동쪽에 위치한 지휘소, '보화정(輔和亭)'이었다. 보화정은 상당산성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보수 공사 탓에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공사 가림판에 마련해둔 조그만 유리창 너머로만 보화정을 슬쩍 엿볼 수 있었다. 아쉬움을 안고 진남문(남문)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딛는 곳마다 온통 진흙밭이다. 푹한 날씨에 나만 몸을 녹이는 게 아니었나 보다.
▲ 남문에서 남측 성벽으로 바라본 모습. 깔끔한 옥개석이 눈에 띈다. Ⓒ박배민
상당산성의 성곽은 수원 화성처럼 잘 다듬어지고 정리된 것이 아니라, 수북한 잡풀과 흙이 뒤엉겨 마치 산의 일부 같았다. 성벽 위로 깔린 계단을 따라 퍽 높은 경사를 올라갔다. 15분 정도 걸어 공남문(남문)과 그를 보필하는 동남 치(雉. 성벽에서 바깥 쪽으로 살짝 돌출된 방어 구조물)를 만났다. 치의 앞뒤 길이는 1, 2미터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다.
남문 쪽 성곽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牆, 또는 성가퀴. 성벽 위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설치한 낮은 담)과 옥개석(屋蓋石, 빗물을 막기 위해 여장 위에 올린 돌 덮개)이 올려져 있었다. 옥개석이 비교적 하얗고 절단면이 깔끔하게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복원 과정에서 새로 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 비교적 평탄하고, 성벽 위에 시멘트를 덮어 보행약자가 걷기 좋은 남쪽 성벽 Ⓒ박배민
남측 성벽 위에는 시멘트를 깔아 질퍽거림 없이 걷기에 좋게 만들어져 있었으나, 예스러움을 즐기는 맛은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가족 단위나 보행이 어려운 일행이 있다면 남문 쪽 성벽 길을 추천한다. 공남문이 '상당산성 남문 소형주차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꼭 성내에 주차하지 않더라도 성벽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경사도 크지 않아 산책 삼아 돌아보기도 좋다.
▲ 왼쪽 끝에 보이는 직각의 구조물이 상당산성의 서남(1호) 치이다 Ⓒ박배민
성벽을 따라 계속 오르다 보면 서남(1호) 치를 만날 수 있다. 서남 치 도달 직전에는 급한 경사로 인해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르막 끝에 있는 서남 치에 다다르면 경사가 갑작스레 급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장면 전환하듯 갑자기 청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광경에 눈이 시원해지며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 상당산성 서남(1호) 치에 오르면 청주 일대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박배민
풍경에 감탄하며 반대쪽으로 넘어가면 공남문(남문)을 만나게 된다. 지금 보는 공남문은 1997년경에 복원한 것이다. 공남문 안쪽은 흙을 옹성처럼 쌓아 올렸다. 아마도 성문이 돌파당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조금이라도 더 방어가 용이하게 설계했던 듯하다. 남문을 지나 서문으로 향한다. 서문으로 나아가는 길은, 청주 전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져, 걸음걸음마다 시각적 향연을 선사한다.
상당산성의 서문은 弭(활 미), 虎(호랑이 호) 자를 써서 미호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직접 본 필자는 잘 모르겠지만, 예부터 미호문이 있는 곳의 지형이 호랑이가 도약하기 전 움츠린 모습과 닮았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미호문 자리에 있는 호랑이가 도약하여 이곳을 떠나면 지기(地氣)가 쇠하게 되므로 범이 떠나지 못하게 호랑이 목에 해당하는 위치에 성문을 세우고 미호문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한다. '弭' 자에는 '그치다', '활', '편안하게 하다' 등이 있다. 각 뜻이 저마다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니, 어떤 맥락으로 미호라 지었는지 궁금하다.
▲ 미호문이 성벽 속에 숨어든 듯하다. 미호문도 동문처럼 평거형 양식의 출입문이다. 1978, 2015 복원. Ⓒ박배민
서문의 성벽은 바깥을 향해 극단적으로 돌출돼 있다. 성벽이 이어지다가 치가 튀어나온 게 아니라, 서문의 출입구 바로 양옆까지 성벽이 두껍게 쌓이면서 성문이 마치 성벽에 파묻힌 것처럼 만들어졌다. 현지 안내판은, 방어 효과를 상승시키면서도 건축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중요했나 보다.
▲ 미호문(서문)에 얹혀진 수막새와 암막새 Ⓒ박배민
서문의 막새(지붕에 얹은 기와 끝에 다는 기와)는 고유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 암막새는 3개, 수막새에는 둥그런 점이 도드라져 있다. 1995년 서장대를 발굴하던 당시 출토된 유물을 참고해 복원했다고 한다. 상당산성의 고유한 부분이지만, 3개와 6개의 점이 무엇을 표현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함께 걷던 짝꿍도 쉬고 싶다고 말한다. 서문에서 성내로 빠지는 길을 통해 식당가로 다시 돌아간다. 짝꿍을 카페에 앉혀 두고 나는 진동문(동문)으로 향한다.
▲ 상당산성의 진동문(동문). 사각형 출입구와 최대한 옛 부재를 사용해 복원(1978)하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박배민
동문은 성내 식당가 바로 위에 붙어 있었다.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남문보다도 고도가 낮은 듯하다. 동문의 출입구는 거의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었다. 양쪽에 돌을 차곡히 쌓아 벽 두 개를 만들고 긴 돌 여러 개를 나란히 덮어서 천장을 완성했는데, 이런 형태를 평거형(平据形) 양식이라고 한다. 새로 하나 배웠다.
▲ 상당산성의 서북측. 상당산성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산성 중 하나다. Ⓒ박배민
동문에서 북측을 통과해 다시 서문으로 발을 재촉한다(상당산성은 북문이 없다). 이 구간의 걷기 난도가 꽤나 높다. 어느 정도 길은 닦여 있지만 경사가 높고, 성가퀴(또는 여장, 성벽 위 작은 담장)가 없어 진흙밭에 미끄러졌다가는 수 m 높이의 성벽 아래로 낙하할 위험도 있다. 필자도 눈에 미끄러져 깜짝 놀란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 성벽 아래에 숨겨진 동북 암문. 비상시에는 흙을 부어 문을 메꾸기도 한다. Ⓒ박배민
북동 측 성벽을 따라 오르다 '동북 암문'을 만났다. 암문은 적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드나들던 문이다. 암문으로 내려가 보니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높이에,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너비다. 암문 내부에서는 빗장을 걸던 구멍과 암문을 만든 기록(강희 경자 오월=1720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의 북측에는 포루터도 두 곳이 있었지만, 정말 '터'만 남아 있어 안내판이 없다면 포루터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 겨울임에도 상당산성을 찾는 가족이 상당히 많았다. Ⓒ박배민
상당산성의 모든 구간을 두 발로 걸어 보니, 경치가 가장 좋았던 구간은 청주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구간이었다. 가족과 걷기 가장 적합한 구간은 동문에서 남문 사이였다.
반면 동문에서 서문 사이는 오르내림이 크고 중간에 성내로 내려올 수 있는 사잇길이 없어 꼼짝없이 계속 걸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접근조차 힘드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운동화와 편한 복장 없이는 몸에 열 낼 마음먹고 가야 한다.
상당산성은 단순히 역사적 장소를 넘어, 사람이 모이고 삶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자연의 일부가 된 상당산성, 산성 내 자리잡은 식당가와 그곳을 찾는 탐방객, 도심과 연결된 시내버스까지, 전체가 한데 어우러졌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져 발굴 조사 보고서 안에 갇혀 있을 줄 알았던 상당산성이 이렇게 사람과 공존하며 산성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흔적과 현대의 활기가 어우러진 상당산성은 오랜 이야기와 새로운 추억이 또 다른 서사를 만드는 곳이었다.
위 글은 필자(박배민)이 오마이뉴스(24. 2. 4.)에 기고한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