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견디기 어렵습니다
질문) “저의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으려 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공중파 방송국 PD로 26년을 일했습니다.
그 시절엔 나름 잘 나갔고, 일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가정 불화로 아내와 이혼했고, 그 뒤로는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외로움에 괴로워하다가, 한 동료에게 ‘혹시 내가 고백을 해도 되냐’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분에게는 성희롱으로 받아들여져 회사에 신고가 들어갔습니다.
결국 저는 6개월 정직을 받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친한 친구에게 빌려준 퇴직금까지 잃고 나니
지금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채 혼자 살아갑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때 잘 나가던 PD였던 제가, 이런 모습으로 사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대답) 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립니다.
이건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존재 전체를 잃어버린 이야기입니다.
직업도, 관계도, 명예도, 삶의 중심도 다 무너졌을 때
우리는 ‘이제 남은 게 없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 ‘남은 게 없음’이 바로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금강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범소유상 개시허망)”
모든 형태 있는 것은 허망하다.
여기서 허망(虛妄)은 ‘가짜’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한때 당신을 빛나게 했던 이름, PD라는 직함, 명예,
그것이 당신의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잠시 머물렀다가 흩어지는 인연(因緣)이었어요.
그 인연이 다했을 뿐, 당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요?
그건 ‘나’라는 이미지가 무너졌기 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야 한다.”
“이 정도는 유지해야 한다.”
이 생각이 깨질 때, 사람은 죽음보다 더 깊은 허무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 무너짐이 바로 ‘무아(無我)’의 문 앞입니다.
불교는 말합니다.
“無我而後 無苦(무아이후 무고)”
‘나’를 놓을 때, 고통도 사라진다.
지금 당신이 겪는 아픔은
벌이 아니라, ‘나’를 비워내는 고행입니다.
26년 동안 쌓아 올린 자아의 성(城)이 무너졌기 때문에
지금 이 고통이 찾아온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멸이 아니라, 진짜 나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자기 해체(self-dissolution)’라고 합니다.
무너짐의 통증을 지나야, 자존감이 아닌 존재감이 자랍니다.
이전의 삶이 ‘성과’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의 삶은 ‘의미’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이루는가 보다,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 나는 끝났다”라고 말하지만,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건 “이제 진짜 시작이다”라는 뜻입니다.
《유마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病者, 是我師(병자 시아사)”
병든 자가 곧 나의 스승이다.
지금의 상처와 실패가
당신을 진짜 삶으로 인도하는 스승입니다.
그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곁에 앉아보세요.
그 속에서 부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질문)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잘 나가던 나”를 애도하세요.
그 시절의 당신은 분명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보내주어야 합니다.
하루에 10분씩, 조용히 앉아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때의 나, 수고했어. 이제 그대는 쉴 때가 되었어.”
애도하지 않은 자아는 계속 돌아와 괴롭힙니다.
그를 떠나보내는 게 곧 새 출발의 시작입니다.
둘째, 자책을 내려놓으세요.
당신이 한 행동이 잘못이었다면,
그건 이미 ‘행동’으로 끝난 일이지, ‘존재의 부정’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업(業)’을 죄로 보지 않습니다.
그건 배움의 흔적이에요.
《잡아함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業은 마음으로 지은 것이며, 마음으로 씻을 수 있다.”
당신이 지금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면
그 순간 이미 새로운 업을 짓고 있는 겁니다.
과거의 행위는 이미 물처럼 흘러갔고,
지금의 마음이 당신을 다시 살립니다.
셋째, ‘남은 삶’을 수행으로 바꾸세요.
지금의 고독, 이 상실감은
당신에게 ‘새로운 마음’을 길러주는 도량입니다.
밥을 짓는 일도, 창문을 여는 일도,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법구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바로 세운 이는, 세상을 바로 세운 자와 같다.”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오늘의 당신 마음 하나를 고요히 세우세요.
그 한 걸음이 곧 불국토로 향하는 길입니다.
당신은 결코 ‘망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이 만들어준 껍질이 벗겨졌을 뿐입니다.
이제는 ‘무너진 나’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를 만나야 합니다.
그건 새로운 직장도, 명예도 아닌
오직 ‘마음의 회복’으로만 가능해요.
《금강경》의 한 구절을 떠올려보세요.
“若人 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闇, 則無所見.”
(약인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마음이 법(法)에 집착한 채 보시하면, 어둠 속에 사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좋은 일도 집착하면 어둠이 된다’는 뜻이에요.
하물며 실패와 자책에 머문다면,
그건 스스로를 묶는 족쇄일 뿐입니다.
이제 그 어둠에서 나오세요.
지금의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건 ‘빈손’이 아니라 ‘텅 빈 손바닥 위의 자유’입니다.
한때 PD로, 아버지로, 남편으로 살았던 그 모든 역할을 벗었으니
이제는 오직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단단한 슬픔이 언젠가 연민으로 바뀔 것입니다.
숨을 길게 내쉬며,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세요.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
내가 만든 업 속에서도,
다시 배워가고 있다.
그 자체가 수행이다.”
《법구경》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과거를 붙잡지 말고, 미래를 탐하지 말라.
현재에 깨어 있는 자, 그가 바로 부처다.”
이제 과거의 명함을 내려놓고,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는 당신을 보세요.
그 호흡 하나가 바로 새 생명입니다.
당신은 이미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