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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1, 마음의 본성을 묻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 일체유심조의 세계

by 이안
나는 지금 무엇을 ‘나의 마음’이라 부르고 있는가.


출근길 버스 안, 창문에 비친 얼굴은 분명 나인데, 마음은 늘 다른 곳을 기웃거린다. 어제의 후회가 떠오르고, 오늘의 걱정이 밀려오며,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가슴 한쪽에서 웅크린다. 마음은 몸속에 있는 듯하지만 잡아보면 어디에도 없다. 어떤 날은 한순간의 표정으로, 또 어떤 날은 묘한 기척처럼 다가온다. 이런 마음을 과연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능가경이 묻는 것도 바로 이 질문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경험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능가경에서 부처는 랑카산에서 문수보살과 마혜수라왕 등에게 깊은 마음의 작용을 설명한다. 이 경전의 핵심 문구 중 하나는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이다. 능가경 구절로는 다음이 있다.


“若離心無別法可得.”

“약리심무별법가득.”

“마음을 떠나 따로 얻을 수 있는 법은 없다.”


부처는 이 말로 세계가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말한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모두 마음의 작용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대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마음의 구조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문수보살은 이 말을 듣고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다. 부처는 마음을 실체로 규정하지 않고, 흐르고 반응하며 스스로 형상을 만드는 능력이라고 풀어 설명한다. 능가경은 이 부분에서 마음이 서로 다른 층위를 갖고 있으며, 그 깊은 곳에는 식(識)의 미세한 움직임이 있다고 말한다. 즉 ‘마음 =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마음 = 흐름·조건·경험의 연속체’라는 구조다.


유식학에서는 이 구절을 통해 마음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마음은 ‘아는 작용’의 총체이며, 어떤 대상도 마음의 조건 없이 경험되지 않는다.


일체유심조를 단순한 주관주의로 이해하면 오해가 된다.


능가경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은 마음을 매개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에 아뢰야식의 작용이 개입한다. 아뢰야식은 경험의 씨앗을 저장하는 가장 깊은 의식층이며,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표면적 자아는 이 저장고의 끊임없는 활동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음은 하나의 객체가 아니라 ‘기능적 흐름’이다. 무자성 사상과도 연결된다. 만일 마음을 실체라고 여긴다면,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능가경은 마음을 끊임없이 변하고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 구조로 설명한다. 마음이 대상의 그림자를 만들고, 다시 그 그림자가 마음을 흔들어 순환 구조를 이룬다.


이 점에서 불교는 서양 고전 철학의 ‘정체성을 지닌 영혼’ 개념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간다. 마음은 본래부터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연기된 흐름이며, 언어로 붙잡히지 않는 과정이다.


능가경의 언어비판도 여기에 닿아 있다. 부처는 문수보살에게 “말은 방편일 뿐, 마음 그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다”라고 거듭 말한다.


“言說을 떠나야 진실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 말은 언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화가 곧 실재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경계하는 대승의 통찰을 드러낸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이미 마음을 굳힌 것이 되고, 그것은 실제 마음의 흐름과 같지 않다. 이 간극을 볼 때 비로소 진짜 사유가 시작된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마음을 단일한 실체로 보지 않는다. 심리학은 마음을 여러 층위의 작용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가장 깊은 층위는 의식이 닿지 않는 무의식 혹은 자동반응 체계라고 말한다. 이는 능가경의 아뢰야식과 놀라울 정도로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 아뢰야식이 경험의 씨앗을 저장하듯, 현대 뇌과학에서도 무의식 속에 축적된 경험이 우리의 순간 판단, 감정, 기억 회상을 결정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표면에서는 “나는 지금 괜찮다”라고 말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더 오래된 감정의 흔적이 반응한다. 능가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아뢰야식의 움직임이다. 마음의 뿌리층이 작동하고, 표면의 나를 움직인다.


또한 현대 인지심리학의 ‘자동사고’ 개념도 능가경의 언어비판과 연결된다.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언어적 판단을 ‘사실’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반응일 뿐이다.


일체유심조는 “경험은 마음의 필터를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 필터를 자동사고로 이해하면 현대적이다.


현상학이나 메타인지 이론도 일체유심조의 현대적 버전처럼 읽힌다. 현상학은 “대상이 아니라 의식 흐름을 먼저 보라”고 말한다. 메타인지는 “마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마음”을 말한다. 능가경의 직관지(自覺智)는 바로 이 영역과 닿아 있다. 마음을 직접 보는 지혜, 즉 마음을 다시 바라보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고 그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오늘 나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보았는가. 떠오른 감정이 곧 나라고 믿지는 않았는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흔들렸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몸속에서 오래 잠들었던 기억 때문임을 보았는가. 일체유심조를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마음만이 진짜다”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깊은 지점”을 키우는 일이다.


마음이 일으킨 파도가 잠시 가라앉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아래에서 움직이던 더 깊은 흐름을 볼 수 있다. 마음은 적이 아니라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그 거울을 고요히 들여다볼 때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밤이 깊어질수록 하늘의 별이 더 선명해지듯, 마음의 가장 복잡한 순간을 통과할 때 오히려 본래 마음의 자리도 가까워진다. 그 자리는 늘 있었고,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오늘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을 바라보라.

그 순간,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철학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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