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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마당쓸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by 진동철

1. 어릴적 종종 보았던 무협소설에는 항상 나오는 대목이 있다. 주인공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복수하기 위해 산속 스승에게 찾아간다. 무공을 배우러 온, 마음이 급한 주인공에게 스승은 마당을 쓸도록 한다. 그리고는 밥을 짓게 한다. 주인공은 무공을 배우러 갔지만 3년 동안 마당만 쓸고 밥만 짓고 있다.


2. 하지만 우리는 안다. 마당쓸기가 내공을 다지는 시간이었음을. 얼핏 보면 스승이 제자를 부려먹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며 지루함을 견디고 집중력을 기르는 시간, 나무를 베어오면서 체력을 기르는 시간, 기회를 기다리면서 자신을 다스리는 시간이 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3. 마당쓸기 시간은 태도와 자세를 배우고 내공을 다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무릇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반복 같은 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4.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단순반복적인 일은 AI가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이제 주니어들은 마당쓸기를 건너뛰고 곧바로 복잡한 문제와 고차원적 과제를 만난다. 효율과 속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 축복 같은 변화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 남는다. 기본기를 다지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복잡한 문제와 고차원적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효율은 높아졌지만, 반복 속에서 길러지던 집중력과 태도, 내면의 성숙은 어디서 훈련할 수 있을까?


5. 나는 답이 ‘형식을 고집하지 않고 정신을 계승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마당을 쓸지는 않아도, 작은 프로젝트를 통해 문제 해결의 기본 과정을 체화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경험을 기록하고 성찰하며 자기 생각을 단단히 세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루한 일을 반복하지 않아도, AI가 내놓은 결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력을 높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6. 주니어 시절, 부장님께서 사장님께 보고하기 위한 보고서를 프린트하고 바인딩하는 것을 종종 했었다. 그때는 느릿느릿 한 장씩 나오는 프린터 앞에서 ‘참 단순한 일을 내가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프린터 옆에서 기다리면서 보았던 보고서를 통해 보고서의 구조를 이해하는 기초 훈련이 되었고, 자료를 다루는 태도를 다지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이라면 AI가 그 모든 일을 대신했을 것이다. AI가 대신하는 시대, 주니어들은 같은 의미를 담은 다른 훈련을 만나야 한다.


7. AI 시대의 마당쓸기는 빗자루와 설거지가 아니다. 그것은 기록일 수도 있고, 질문일 수도 있으며, AI와의 대화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들여 기초를 다지는 경험”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마당쓸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그 변화를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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