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HR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순전히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나는 공대 출신으로 IT기업에서 기술전략을 수립하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기술전략 부서와 교육 부서를 한 분의 임원이 맡고 계셨다. 그 임원께서 어느날 인력순환을 제안하셨다. "옆 부서로 옮기고 싶은 사람?"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유일하게 나만 손들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슨 용기로 그렇게 손을 번쩍 들었을까? 생각해보면 오래전부터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형이 내게 말했다. “넌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아, 그런가? 내가 알려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내 안에 씨앗처럼 남았다.
그렇게 나의 HR은 우연처럼 시작되었다. 엔지니어에서 HR로의 전환, 그 시작이었다.
부서 이동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난 교육부서 책상을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나보다 연차는 어리지만 먼저 교육업무를 해왔던 대리와 함께 교육과정 운영을 하면서 하나하나 업무를 익혀나갔다.
사람의 일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기술과 달리 사람은 예측할 수 없고, HR은 그 불확실성과 함께 성장하는 직업이었다. 엔지니어였던 나는 처음으로 계산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서 있었다. 그때마다 기술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찾아왔다. 정답이 있어 보이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나를 결심하게 만든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HRDer를 찾는 헤드헌터의 전화였다. 원래는 나와 친했던 동료에게 전화했는데 그 동료가 나를 추천한 것이다. "작은 회사인데, HRD 전반을 맡을 수 있습니다." 큰 회사에서 근무하면 HRD 분야 중에서도 교육 기획, 교육운영, 조직문화 등 일부 영역만 담당하는데 작은 회사는 혼자서 이것저것 다 해야 한다.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이렇게 이직해서 그 회사로 가면 난 정말 계속 HRD만 해야하는데? 돌아올 곳이 없는데? 몇날며칠 고민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고민 끝에 난 결심했다. “그래, 기술로 다시 돌아갈까를 고민만 하지 말고 아주 이 길로 쭉 가보자. 난 교육운영만 좀 해본 것 밖에 없지 않냐. 좀더 깊게 경험해 보자. 더 늦기 전에 밑바닥부터 제대로 굴러보자.” 고민은 길었고 결심은 짧았다.
그렇게 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HR 땅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과거는 다시 기웃거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내 인생의 큰 골목을 하나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혁신 연구의 대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서 '열망과 목표를 추구하는 것과 예상하지 못했던 기회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자신이 하버드 교수가 되기까지 어떻게 의도적 전략을 밀고 당기고,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여행을 순항했는지 들려주고 있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은 커리어와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우연한 기회로 인해 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게 되고 그 골목에서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미국 커리어상담의 대가로 불리는 스탠포드대학 존 크럼볼츠( 교수는 이것을 '계획된 우연 이론(Planned Happnestance Theory)'이라고 부른다. 우연적인 사건(Happenstance)이 기회로 전환되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계획된' 우연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경력 선택과 발전에 있어서 우연한 사건과 기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
'계획된 우연'은 우연한 기회가 단순한 운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개인의 경력 개발과 학습 과정에서 우연한 사건과 기회를 적극적으로 창출하고 활용함으로써 성장과 성공을 도모한다. 우연의 일치 또는 우연한 만남을 통해 커리어 피보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든 것은 계획된 우연이었을까? 헤드헌터의 전화를 받고 좀더 작은 회사에서 가서 HRD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우연이었을까? 이제는 안다. 그때 손을 든 건 우연이 아니라, 나의 본성에 이끌린 필연이었다. 내 안의 씨앗을 잊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