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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김 Jul 11. 2022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있나

삶에서 삶을 건져내기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첫 문장을 읽자마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살고 있을까. 살 가치를 명확히 알고 있지는 않다. 살 가치가 없지 않다는 것만 희미하게 느낄 뿐이다. 마냥 좋은 삶은 아니었다. 상처를 받고 깨지고 상처를 주고 깨졌다. 누가 주고 누가 받았든 상관없이 상처는 흉터로 남았다. 바랐던 바는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고 계획은 번번히 틀어졌다. 싯다르타가 한 삶은 고통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공감했다. 삶은 만만치 않다.


고되지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른 사람과 연결된 죽음만 접했지 나와 연결한 적은 없다. 충분히 고통받지 못해서일까. 모든 것이 무너질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에야 죽음을 생각하게 될까.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건 경솔하고 섣부를지 모른다. 게다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라니. 하지만 카뮈의 말처럼 이건 중요한 문제다. 죽음에 가까워져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할 수 있다면 살면서도 삶을 선택할 수 있을테니까. 


내 삶의 폭과 깊이로는 죽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지독한 고통을 받고도 결국 살아낸 사람을 살펴보려한다. 소설가 박완서이다. 1988년 5월 11일 남편 사망, 같은 해 8월 31일 아들 사망. 박완서에게 고통이 닥쳤다. 카톨릭을 믿었던 박완서는 아들을 데려간 이유를 알려달라 신에게 묻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고 박완서는 분노한다.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무 대답없는 신에 대한 분노. 박완서의 몸은 살기를 거부한다. 들어오는 것, 나가는 것 모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구멍이 뚫린 마음은 악독해지기 시작한다. 수녀원에서 묵던 박완서는 옆방에 있던 여성을 단지 자녀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미워한다. 단둘이 점심식사를 하게 된 날, 박완서는 아니꼬운 마음이 들어 보란 듯 카레라이스를 아귀처럼 먹어댄다. 몸은 한꺼번에 들어온 음식을 버티질 못했다. 변기를 부여잡고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는 동안 박완서는 깨닫는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카레라이스를 모두 토해낸 후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서야 처음으로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박완서는 죽고자 했던 자신이 지금은 허기를 급히 채우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죽기 위해 온 수도원이 사실은 살기 위해 온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짐승처럼 질긴 생명력이 살라고 명령한 결과였다. 박완서는 인간과 짐승이 모두 가진 살고자 하는 생명력이 신이 준 능력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다시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수녀원을 나온 박완서는 아는 신부님의 방에 잠시 들른다. 탁자 위에 놓인 필통에 쓰인 ‘밥이 되어라’라는 글귀. 박완서는 그때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의 요청에 신은 대답을 했었다. 다만 말이 아니라 밥으로 대답한 것이다. 어서 이 밥을 먹고 다시 살아가라고. 너의 생명력을 부여잡으라고. 이후 박완서는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고 아들없는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된다.


박완서는 나에게 죽음에서 살아나는 방법 세 가지를 알려주었다. 첫째, 답을 요구하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요구하는 동안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대답을 발견하라.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아 놓쳤을 수 있다. 셋째, 살고자하는 생명력에 목적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힘들 때 살기 위한 목적을 찾으려한다. 목적을 찾지 못한다면 지금 내 생명력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저열한 본능이 될 것만 같다. 그래서 목적을 찾는 여정에서 끓어오르는 식욕은 흔히 부정당한다.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난 후 밥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전도연처럼. 삶의 목적은 오히려 생명력을 긍정했을 때 찾을 수 있다. 


아직 나의 죽음은 오지 않았다. 가까이 가 본 적도 없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게 다가온다면 슬프고 화가 날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련이 부당하다며 신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살겠다 굳게 다짐해놓고도 마음이 약해져 주저앉을 수도 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눈은 흐려진 채로 정말 이제 끝인가 싶을 때 떠올릴 것이다. 답을 요구하고 대답을 발견하라. 그리고 밥을 먹어라. 맛있게. 그러면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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