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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김 Aug 28. 2022

내 인생 책임져

드디어 올라섰다.  게임의 최고등급인 전설. 게임을 시작한  8 만이다.  오래 걸렸다. 전설을 달기 위해   시도한 적이 있지만, 항상 똑같이 미끄러졌다. 계속 이기면서 쌓은 포인트를 지독한 불운으로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고통스러웠다. 이번에는   있을 거란 기대는 무너졌고 결국  시간 동안 얻은 거라곤 손끝, 발끝까지 퍼지는 허망함뿐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늘어졌다.


고통받으며 게임 할 필요가 있을까. 게임은 즐거워지라고 하는 건데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건데 이건 꼭 고문 같았다. 누구도 떠밀지 않은 고통이었다. 온전히 내 욕심이었다. 게임을 시작했으니 최고등급도 찍어봐야지 하는 욕심. 내가 스스로 좁고 축축하고 거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어서 전설을 달라고. 결과는 고통과 허망함이었다. 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고 전설을 달아야 한다는 마음을 버렸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 제 인생 책이에요.” 6월의 파리, 여행카페를 통해 한국 여행객들과 저녁을 먹기로 모인 어느 식당이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 파리지사로 출장 왔다는 동공이 또렷하고 힘이 있는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한 말이었다. 흔히들 생각하는 너는 이대로도 충분하니 너를 움직이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의 말들에 신경 쓰지 말라는 힐링 책이 아니라며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 메뉴가 나오며 화제가 금세 바뀌었지만 나는 <신경 끄기의 기술>에 꽂혀버렸다. 인생 책이라고 나온 책이 흔한 베스트셀러일 줄이야. 따분한 자기 계발 책처럼 ‘긍정적 마인드가 중요하니 으쌰 으쌰 하세요’ 같은 내용으로 버무려진 책은 아니겠지? 왜 저 사람에게 인생 책이 된 걸까.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들어가는데 공헌했을까. 어떤 책이길래 말하면서 눈이 단단해지는 걸까. 한국에 돌아가면 꼭 읽어봐야겠다.


엄청난 책이었다. ‘고통을 선택하라. 인생을 책임져라. 나머지는 신경 꺼라.’ 건조하고 약간 유머러스한 말투로 던진 메시지는 단순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처럼 매끄럽고 차분하고 아름다운 서사로 우아하게 말을 몰아 큰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반대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에 구멍 난 부분에 딱 들어맞는 모양이었기에 쑥 들어왔을지도.


살면서 도망친 적이 많다.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주저앉아 버리고 눈을 감고 얼어버렸다. 내 잘못이 아니니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책임지지 않으려니 자연히 고통과도 멀어졌다. 달콤했다. 도망친다면 책임지지 않으면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니. 그래서 도망쳤다.


도망쳤지만 상황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저 깊은 곳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만 같았다. 형체가 보이지도 않고 굳이 다가가 확인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아직 숨이 붙어있어 나를 지켜볼 것만 같았다. 찝찝해서 수습한 척도 했지만, 오늘도 대충 수습하는 오대수였다. 수습은 책임지는 게 아니었지만 책임지는 거라 나를 속이기도 했다. 도망치고 속일수록 이제는 책임지고 받을 고통은 받으라는 마음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스멀스멀 커지다 책에서 똑같은 주장을 찾으니 그냥 훅 당겨 끌어안은 게 아닐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전설에 오르고 싶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잘하고 싶었다. 정말로. 하지만 올라가는 도중 쓸리고 넘어지고 깨지는 게 너무 아파 관두었다. 관둔 내 모습이 초라해 굳이 저기까지 오를 필요 없었다 합리화하고 그만뒀다. 신 포도였다. 나는 끝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고통스러워 도망간 거다. 전설을 달고 싶은 내 마음이 마치 누군가 조작해낸 것처럼 대했다. 정말이었는데.


이제 고통을 선택하고 책임지고 나머지는 신경 끄기로 했다. 시간이 남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을 때 얼른 앉아서 게임을 했다. 놀랍게도 똑같이 이겨서 포인트를 땄다가 계속 져서 모든 걸 잃었다. 놀랍게도 똑같이 아팠고 화가 났다. 놀랍게도 똑같이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다. 잠깐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맞았고 내가 이겼을 때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떠올렸다. 붕 떠서 표류하던 마음이 진정되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전설에 올랐다.


미국의 어떤 특수부대는 무한히 책임지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네 잘못이 아니어도 결국 네 탓이니 책임지라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 생각했다. 잘잘못 따지는 것도 안 되나? 다른 사람이 책임질 수 있으면 책임져야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된다. 운이 없어서 게임에 질 수 있다. 실력이 없어서 게임에 질 수 있다. 모두 똑같이 포인트를 잃는다. 운이 없어 포인트를 잃는다고 누가 대신 쌓아줄 수는 없다. 포인트를 다시 쌓아야 하는 건 결국 나뿐이다. 그러니 책임지고 다시 게임을 해야지. 그리고 다시 살아야지. 이번에 고통받고 책임지고 전설 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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