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이 순삭되는 곳
얼마 전 남편과의 대화에서 우린 서로에게 물었다.
“당신은 뭐 할 때 시간이 순삭이야?”
남편의 행복한 시간이 궁금했던 내가 먼저 물었고 요즘 골프에 열심인 남편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골프 칠 때? “라고 끝을 올려 답했다. 우린 4년째 주말부부로, 주중에 멀리 지방에서 일하는 남편은 매주말마다 4-5시간을 운전해 기필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식사 후 다시 3시간 반 가량 운전해서 직장이 있는 지방의 숙소로 돌아간다. 피곤함을 무릅쓴 그의 여정 사이 이틀의 주말, 소파에 누워 나른한 시간을 보낼 때의 남편이 무척 행복해 보였기에, ‘주말, 집에 있을 때!’라고 답할 줄 알았던 나의 예상은 시원하게 빗나가버렸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취미가 생긴 남편의 모습에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당신은 언제 시간순삭인데?“
남편이 곧장 되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바로 답했다.
“B2에서 글씨 쓸 때!”
정말 그렇다. 조용한 B2, 구석 자리에서 커피 한잔 놓고, 글씨를 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 순간 등 뒤로 손님들이 북적이고 홀짝이던 커피가 식어있곤 한다. 그곳에선 시간이 늘 순삭이다.
요즘은 어디나 그렇겠지만 우리 동네에는 카페가 정말 많다. 유명한 프랜차이즈는 물론이고 예쁘게 꾸며진 개인카페까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카페들이 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산책 중 새로운 카페를 발견하면 항상 먼저 들어가 보자고 한다.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해서 새로운 것에 잘 도전하지 않는 나지만 남편 덕분에 신상카페를 경험할 기회를 얻곤 한다. 새로운 카페에 가면 나는 항상 기본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단 음료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기본커피를 마셔보면 그 집의 커피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때로 핸드드립을 해주는 곳에 가면 첫 번째 방문에는 예가체프를 주문한다. 나의 커피취향으로 그 카페와의 궁합을 보는 나만의 과정이랄까. 카페마다 고유의 분위기와 커피맛이 있고 시그니처 메뉴가 있으니 나와 맞는 카페가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는 법이다. 사실 나는 커피맛에 대해 그리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딱 하나- 물을 너무 많이 타서 싱겁고 양만 많은 커피만큼은 끝까지 마시기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커피를 남기는 법은 거의 없다.
가끔 남편과 산책하다가 문 연지 고작 몇 개월 만에 폐업한 곳을 보면 뭔가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어떡해, 저기 벌써 문을 닫았나 봐! 인테리어에도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어쩌냐! “ 하면
“당신이 안 가서 그렇지.”라고 남편이 말한다.
‘내가 안 가서 그렇다고? 차음엔 그게 무슨 소리야.’ 했다가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맞는 말이었다. 처음 한 번은 가보더라도 발걸음이 뜸해지고 찾아오는 손님이 더는 없어지면 가게는 유지하기 어려우니까. 나도 두어 번 발걸음 하고 안 갔기 때문에 더 가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문 닫는 이유도 유추해 볼 수는 있었다. 저마다 새로 오픈할 때는 열정과 의지가 있었을 텐데 손님에게 가닿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반면에 롱런하고 잘 되는 카페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매일 일정한 시간에 부지런히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B2에는 바쁜 와중에도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주는 사장님이 있고, 창 밖의 풍경은 4계절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어서 이곳의 맛있는 커피와 브런치마저 내게는 뒷전일 정도다. 단정하고 익숙한 음악, 깨끗하고 쾌적한 공기, 카페의 편안한 분위기가 대화 나누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섞여 딱 적당한 백색소음이 된다. 먼지 날리지 않는 바닥과 깨끗한 테이블과 의자, 하얀색 커튼에 맑은 유리창, 푸른색의 마르지 않는 화초들만 보아도 사장님의 손길이 얼마나 한결같은지 예상할 수 있다. 주부라면 더욱이 티 나지 않는 그 쾌적함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B2를 다니면서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 한결같음이 롱런의 비결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난 주말, 친정에 갔을 때 언니부부와 함께 방문한 힙한 바닷가 옆 카페에서, 우리는 아지트카페를 고르는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카페는 몇 년 전
처음 발견한 후로 친정에 갈 때마다 한 번씩은 꼭 들르게 되었는데, 그 시골과는 매우 이질적인 키치하고 힙한 분위기에 더 힙한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처음 그곳에서 커피를 주문한 날, 타 지역에서 오신 그분들이 어쩌다 그곳에 카페를 열게 되었는지 어떤 콘셉트를 가진 카페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자신들만의 컬러가 확실하고 커피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는 사장님. 그래서 처음 그곳을 방문한 손님에게는 매번 일정한 톤으로 본인들의 커피에 대해 정성스럽게 설명한다. 같은 말을 그토록 반복하는 게 절대로 쉽지 않을 테지만 커피를 고르는 손님이 그들의 취향에 맞는 커피와 만날 수 있도록 기꺼이 돕는 중일 것이다.
서울 왕십리에 살고 있는 언니도 집 근처에 책 읽으러 늘 가는 카페가 있다고 했다. 커피맛은 그냥 그렇지만 커피맛을 이기는 더 중요한 무엇이 그곳에 있단다. 그곳만의 분위기, 나와 맞는 결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공간이 주는 에너지를 느낀다. 커피값을 지불하지만 동시에 공간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공간에서 누리는 힐링타임에 대한 값으로 커피 한 잔은 정말 저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가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은 커피를 마시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청라에서 7년째, 내가 이사 오고 얼마 후에 오픈한 B2도 나와 비슷한 역사를 쓰고 있다. 낯선 동네, 새로운 이웃처럼 낯가리던 시절부터 쭉 함께해 왔다. 그곳에서 읽은 책, 쓴 글씨, 만난 사람들까지. 모두 정말 귀하다. 손님이 오면, 좋아하는 친구나 가족이 오면 데려가는 곳, 혼자서도 가고 아이들과도 가고, 남편과 산책하다가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는 곳 나의 아지트,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면서, 내가 또 나를 만나는 장소이다.
“당신의 시간이 순삭 되는 곳은 어디인가요? 그런 아지트 하나쯤 가지고 있나요? 혹시 청라에 오신다면 B2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오늘도 향긋한 커피와 함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