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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석준 Seok Joon Kwon Mar 27. 2023

로스트 테크놀로지의 사례

기초과학에서 음악과 미술까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기술들

로스트 테크에 대한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정보도 주시고 다양한 케이스도 주셨는데, 몇 가지 케이스는 아카이빙 해두는 것이 모두를 위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정리합니다.

 

1. IBS에 계신 Sanghyeon Chang 박사님께서 알려 주신 사례:

'LIGO 중력파 발견이 가능했던 것이 일반상대론을 근사법이 아니라 블랙홀의 합쳐지는 순간까지 그대로 전산모사하는 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죠. 어떤 이는 중력파 발견에 대한 노벨상은 이 방식을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검출된 중력파 시그널이 정확하게 시뮬레이션 결과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몇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이 시뮬레이션을 했고, 그중 한 사람이 한국분입니다. 중력파가 검출되기 전에 이 분은 한국에 돌아와 계약제 연구원을 했었는데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 경영 쪽으로 전공을 옮겼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중력파가 발견되고 이쪽 연구가 각광을 받게 되었죠. 이분이 2005년에 만든 Hahndol (Einstein) code로 2016년 발견된 두 개의 블랙홀 충돌에서 나오는 중력파 패턴을 정확하게 예측했었죠.

https://slidetodoc.com/gravitational-waveforms-from.../'


2. 신영우 선생님께서 알려 주신 사례:

'진시황의 병마용에서 나온 청동검에 크로마이징 (Chromizing) 이 되어 있었다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어떤 경우든지 그 기술의 당사자들은 미래에 있어서의, 그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크로마이징은 19세기말이 되어서야 발견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진지황병마용의 발굴 외에도 부차의 검 등이 부식 없이 나온 걸 보면 그 당시에는 부식방지나 강도향상을 위해 청동기에 많이 행하여졌던 가공법인데 철이라는 비교 할 수 없이 우월한 재료가 나오면서 자연히 잊혀버리게 된 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사례로서는 처음 경주박물관을 만들고 경주감영에서 시간을 알리던 용도로 사용되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새로 만든 종각에 걸기 위해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방법이 없어 결국 어딘가의 논바닥에 굴러다니던 옛날에 쓰든 철봉을 구해와서 끼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봉을 잘라 단면을 보니 종잇장처럼 얇은 층으로 이루어진 단접상태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단접기술에 대하여는 예전에 칠지도에 대한 기사 중에 고대역사책에 백제의 검은 백 겹이었다는 기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접의 대명사인 다마스쿠스 가 문제가 아닌 물건이었겠지요.'


3. 에프시엘코리아 이동현 대표님께서 주신 사례:

'실제로 패션사업에서는 말씀하신 분야에 관심도 많고 상품개발도 활발히 진행 중이지만 패션에 대한 이해가 높은 섬유공학자 또는 섬유에 대한 이해가 높은 패션산업 종사자가 적은 탓에 진도 나가는 게 더디다 생각됩니다. 이 와중에 섬유공학 전공자는 더더욱 없어지고 있고요. 현재는 의류학과에서 관련 내용을 연구하고는 있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섬유공학 전공자들이 적극적으로 산업을 개척하지 않은 탓도 크지만요. 소재는 연구하시는 분들이 비교적 많고 다양하지만 방적, 제직, 편직, 염색, 가공은 연구하시는 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섬유화학 쪽은 그나마 낫겠지만 섬유물리 쪽은 제가 공부할 때도 거의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패턴, 봉제까지 연결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소재도 합섬 쪽은 있지만 천연섬유 쪽을 연구하시는 분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4. Insiganry 강태진 대표님께서 주신 사례:

'2014년 Austin의 SXSW에서 나의 젊은 시절 히어로였던 Neil Young을 만났었습니다. Neil이 삼성에게 뮤직서비스 관련해 제안할 게 있으니 담당 임원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당시 글로벌뮤직 서비스 밀크를 담당했던 제가 그의 호텔방에서 미팅을 하게 된 거였죠. Neil은 스티브잡스가, 음악을, 더 정확하게는, 음악 듣는 경험을 망쳤다고 했습니다. 애플의 iPod와 iPhone, 그리고 iTunes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MP3 형태의 음악이 전부인 줄 알게 됐다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아티스트들이 스튜디오에서 공을 들여 녹음하고 믹스한 음악이 MP3로 변환되며 디테일과 뉘앙스가 잘리고 뭉개져서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다 보니 완벽한 소리를 얻기 위해 들어갔던 땀과 시간이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고 이대로 일이십 년이 지나면 그런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리코딩 엔지니어들과 테크니션들이 다 사라져 버릴 거라고 했습니다. 고품질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는 것은 인류에게 큰 손실이기 때문에 늙은 자신이라도 나서서 그것을 막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애플은 여기에 관심이 없으니 삼성이 lossless music 보급에 역할을 해주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HD 뮤직을 보급하기 위해 Pono라는 HD 전용 뮤직플레이어와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작할 거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Neil은 다음날 SXSW 세션에서 Pono 런치를 발표했습니다. 여러 번의 SXSW에 참석해 많은 세션을 봤는데 스피커가 입장하는 순간에 관객 전원이 일어나서 손뼉 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알 고어가 입장할 때도 기립 박수를 하지는 않았거든요^^) 안타깝게도 Pono는 몇 년 후 문을 닫았습니다. 교수님 글을 읽으며 문서화하기 힘든 도제식으로 기술이 전수되는 뮤직리코딩 같은 분야에서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나올 가능성이 더 크겠구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행히 요즘 Tidal 같은 Hi-Fi 스트리밍 서비스도 나오고 LP가 다시 돌아오는 등 고품질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Hi-Fi 뮤직 리코딩 기술은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안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5. 강재승 박사님께서 주신 사례:

'2차 대전 즈음까지 쓰인 거대 전함과 대포도 해군 교리가 바뀌면서 사장되었고, 지금은 그런 거대한 전함과 포를 만들고 싶어도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어서 만들 수 없다고 하더군요. 어찌 보면 그냥 큰 대포일 뿐인데도(…) 쓰일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불과 몇십 년 전에는 그걸 (물론 미국 및 열강의 막강한 공업생산력 덕분이겠습니다마는) 전시에 수 척씩 뚝딱뚝딱 만들던 게 ‘당연한’ 거였는데, 오히려 조선업 관련 첨단기술은 발전했음에도 단 한 척조차 재현할 수 없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요(…)'


6. Jimmy Strain 님이 주신 사례:

'"고품질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는 것", 즉, 숙련된 엔지니어의 멸종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 악기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LT가 될 상황입니다. 음원제작 최종단계에 다가갈수록 유통/재생 방식(방송표준, 스트리밍 표준, 핸드폰이라는 재생 하드웨어 등)에 따라 평준화가 쉬워지므로 알고리즘으로 장르에 맞춰서 마스터링을 대신하는 서비스는 이미 높은 완성도로 우리 곁에 있고, 리코딩/믹싱 엔지니어들의 실력과 taste가 음원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이 또한 수음이 필요한 실제 악기보다 샘플링의 비중이 많아져서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방구석에서 그래미까지"를 실현해 낸 빌리 아일리시의 사례가 그와 같이 특정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과 그들의 기술)이 LT가 될 일만 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아니었나 싶고요. 


끝으로, 역시 사견입니다만, 고품질 음원을 고수하는 건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일단 결정적으로 그 고품질의 수준(품질 차이)을 느낄 수 있는 청취자 혹은 청취환경이 대단히 적습니다. 당사자들은 고품질을 고수한다는 행위가 청취자의 better experience에 기여한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만드는 사람들의 즐거움에 그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게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조금 더 실제 리코딩에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자면, 제 경우에 4집은 디지털 플러그인만으로 모든 기타 앰프 소리를 녹음했지만, 이제부터는 다시 그 이전에 했듯 실제 진공관 앰프 리코딩 위주로 하려고 하는데요, 이게 순전히 리코딩하는 제 개인의 재미 때문이지 그게 더 '품질 우위'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전용 모델러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상으로도 이미 세상에 유명한 모든 앰프가 존재하고 무엇보다 실제 하드웨어보다 전기적 잡음에서 자유롭다는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리코딩에 유리한 면이 있습니다. 소리를 만들기 쉽고 진공관 유지비 절감이 된다는 것들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요.


비용을 떠나, 수고스럽게 진공관 사서 모으고 기판 청소해 가면서 실제 앰프와 스피커를 사용하여 녹음했을 때의 차이가 녹음에 참여한 당사자 밖에 없게 될 확률이 앞으로 늘어날 거라 믿는 데는,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마샬 앰프나 펜더 앰프를 들어본 경험이 기타리스트들 집단내에서도 갈수록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타리스트들 중에도 상당수는 소위 crank-up 된 마샬을 직접 경험해 본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마샬 앰프 소리는 이렇다, 펜더 앰프 소리는 이렇다'는 식으로 자신이 그 소리를 안다고 믿을 것이고요.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수와 LT의 수는 반비례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고, 단순히 수요에 LT의 증감이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어쩌겠습니까, 그 '수요'가 비용절감과 편리에 맞서는 것이라면 당연히 LT가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삼성이 하만카돈을 100번 고쳐 인수한다 해도, '청취의 풍경'이 LT가 되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닐까요? '


7. 국가수리과학 연구소 오정근 박사님께서 알려 주신 사례:

'IBS 장상현 박사님께서 언급하신 케이스의 장본인인 최대일 박사님이 한국에 계실 때 제가 제 과제를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최박사님이 공동책임자로). 뭔가 해보자고 기획했는데, 한국을 떠나시면서 유야무야 해졌죠. 안타까운 점은 수치상대론 (Numerical Relativity)분야가 이론/시뮬레이션 등등에 시간과 공이 많이 들어가 실적이 잘 나오기 어려운 분야라는 것입니다. 수치상대론 코드와 IMR.. EOB, 등등의 근사수치기법을 개발한 역사는 매우 오래되고 사람들도 다양하기에, 마치 피라미드를 쌓는 일과 같아 누구에게 업적을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점이 있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그 시뮬레이션이 가능하게 한 슈퍼컴 개발자들의 역량도 인정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고... NR시뮬레이션 템플릿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서 이후 사람들은 더 효율적인 템플릿 계산을 사용합니다. AI를 이용하기도 하고요. 실제 저 조밀한 시뮬레이션은 Parameter Estimation과정에서 사용하고요... 신호탐사용은 NR레벨이 아닌 근사템플릿으로 우선적으로 빠르게 검출하는 파이프라인을 씁니다.'


이런 실전된 기술 사례들의 공통점은 상위호환 기술이나 경제적 논리에 앞서, 그 기술이 필요 없어지는 시점에 제대로 노하우나 기술 디테일을 기록한 문서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다는 것. 특정 기술과 산업이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어 망할 때 망하더라도,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재현 가능한 문서와 자료를 이중삼중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냥 디지털 형식이나 클라우드에 백업하는 개념 정도가 아니라 가급적 인쇄된 형태로 한 부씩은 더 남겨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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