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83년 1학년이 되어, 88년 6학년까지 다니고 89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교복은 입지 않았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으며, 겨울엔 번개탄과 석탄을 함께 받아와 난로를 피웠고, 우유급식도 했다. 지금과는 다르게 선생님들은 사랑의 매로 우리를 후두려치는 일이 많았고, 학기마다 부모님과 면담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촌지를 받는 문화가 있던 시대였다. 열이 펄펄 끓어도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상이 개근상이란 것을 알았기에 결석은 꿈도 못 꿨었다. 실내화 가방에 하얀 실내화를 넣어가지고 다녔고, 일주일에 한 번씩 책걸상을 밀어놓고 집에서 가져온 마른걸레와 선생님께서 주시는 하얀 왁스로 교실의 마룻바닥을 광내야 했다. 학교 건물의 가운데에 있던 정문은 교실까지 가장 합리적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통로였지만, 선생님들만 이용할 수 있는 금단의 문이었고, 등교할 때마다 지각은 할지언정, 교문 초입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만 했다. 놀기 위해 친구들을 부를 땐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라 친구 이름을 무작정 불러댔고, 웅변학원, 속셈학원에 다니는 시간이 가장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국민학교 미술시간에 주제를 정해주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자주 있었는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상상화 그리기'였다. 주로 나는 자동차, 우주여행, 로봇 등의 허무맹랑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상상한 년도는 대충 2000년대 초반으로, 우리가 한창나이에 이 시대를 지나고 있을 것이란 걸 생각하지 못하고 그렸던 것 같다.
지금도 생각나는 부반장의 상상화가 있다. 2002년의 국민학교 모습이었는데, 각자의 책상과 교실 앞 칠판 자리에 텔레비전이 있어서 모두들 그것을 보며 수업을 받는 그림이었다. 물론 선생님은 온데간데없고 로봇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는 단순히 자기 텔레비전이 하나씩 있다는 것과 로봇에게 배우기 때문에 더 이상 선생님에게 혼나거나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정말 저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 자녀들은 그보다 더한 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고, 자기 방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친구들이 화면 속으로 모두 등교하길 기다리게 되었고, 쉬는 시간에는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대신 화면을 끄고 핸드폰으로 카톡을 하고, 게임을 하게 되었다. 원래 알던 친구들 말고는 새로 한 반이 된 친구의 이름과 얼굴은 학기 내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었고, 아이 창 밖으로 널따랗게 보이는 학교 운동장은 아무도 밟지 못한 지 몇 달이 지났다. '학교 가기 싫어'가 입에 붙어있어야 정상일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 가고 싶어'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들이 즐겨 가던 만화카페와 분식집과 디저트 카페에 마음 놓고 가지 못하게 되고, 축구선수를 꿈꾸며 대회에 나가 골을 넣고 싶어도 대회가 취소되고, 밖에서 놀거나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마저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마스크 쓰지 않고 마음껏 밖에서 놀았으면 좋겠고, 매일 학교에 가면서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어'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고, 용돈으로 만화카페든 분식점이든 친구들과 마음껏 가서 마음껏 먹고 놀았으면 좋겠다. 학교는 국어, 수학, 영어 만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으로서 친하게 지내는 법, 갈등을 해결하는 법, 싸우고 화해하는 법, 배려하는 법, 경쟁하는 법,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터득하던 곳이다.
학교를 가지 못하며 아이들이 지나온 1년, 또 얼마가 될지 모를 앞으로의 시간들이 그들에게 어떻게든 배움과 깨달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처럼 왜 박쥐를 먹었는가, 왜 공항을 폐쇄하지 않았는가, 왜 마스크를 쓰지 않았는가, 왜 밖으로 나갔는가, 왜 모였는가에 대해 원망하고 증오하고 단죄하려 하기보다는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고,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