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나이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때가 되면 알 수 있어",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럼 이해할 거야"
이렇게 나이로 규정해 버리는 경험 또는 지식들이 있다.
특정한 나이가 되기 전에는 마치 짐작도 할 수 없다는 듯 딱 정해버리는 일들 말이다.
나는 자칭 "나이 든 MZ"이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이가 어려도 연배가 있는 선배들과 사고가 비슷하고 좋아하는 노래나 취향이 비슷한 후배들도 많이 봐 왔고, 나이가 많은 선배 중에도 나보다 또 그보다 훨씬 어린 후배들보다 더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이나 취향을 가진 선배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아닌 것 같다. 나이라는 때가 묻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최근 5년 사이에 세명의 가족을 잃었다. 5년쯤 전에 간암으로 오빠를, 3년쯤 전에 뇌종양으로 엄마를, 1년쯤 전에 췌장암으로 아빠를 잃었다.
그 5년의 세월은 간병과 이별의 반복이었다. 채 이별의 아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다른 간병이 시작되고 그 간병의 끝에 이별이 오고... 이 사이클의 연속이었다.
최선을 다해 슬퍼하며 이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인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마지막 아빠를 보내고 일 년 이 년 차가 돼 가면서 비로소 이제 나는 나에게 세명의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하고 그 상실감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알 것만 같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어떤 기쁜 일이나 좋은 일이 있건 간에 최선을 다해 완벽하게 홀가분하게 기쁘지 않다. 반대로 슬픈 일이 있을 때는 그 슬픈 일이 오롯이 더 깊게 슬프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에게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지만, 그 가족과 나눌 수 있는 것과 원가족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미세하게 다르고 그 미세함은 같아지지 않는다.
가끔 궁금해서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엄마도 언젠가 죽을 텐데 엄마가 죽으면 너희는 어떨 것 같아?" 그럼 아이들이 대답한다. "엄마 백세시대고 120세까지 평균적으로 산대, 걱정하지 마" 하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의 나처럼 엄마가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을 할 수 없기에 나온 대답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 또한 그랬었으니까.
나는 나의 아이들은 이별이 어떤 것인지 조금 미리 알고 대비하면 충격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때때로 엄마가 언제라도 부재할 수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서 이런 것, 저런 것을 해야 한다고 가끔 농담처럼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걱정 말라며 코웃음 친다. 상상할 수 없으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특정한 나이가 돼서 특정한 경험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감정, 지식, 경험은 있다.
나이가 들어 가족을 잃고 찾아오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 공허함, 외로움
갱년기 증후군이 찾아와 혼자만 땀을 뻘뻘 흘릴 때 찾아오는 당혹감, 부끄러움
사춘기 막둥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의 의견에 반대하는 낮은 톤의 차가운 목소리를 낼 때 느끼는 기막힘
나는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대접을 못 받았다고 느꼈을 때 때때로 찾아오는 서운함
나의 사랑이 절대적이었던 아이들에게 이제 더 이상 내가 1순위가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질 때의 그 서러움(내가 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젊은 시절 크게만 보이던 어른들의 작아진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측은함
핸드폰의 글자가 예전처럼 잘 보이지 않고 나도 모르게 폰을 자꾸만 멀리 가져갈 때 느끼는 억울함
이 사실들을 알고 나니,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부모님에게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돌아봐진다.
내가 느꼈던 저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고 살아가셨겠지?
마지막 간병의 순간에 나는 또 얼마나 모진 말들을 많이 했을까? 미루어 짐작하기도 힘들다.
이 모든 걸 이제야 알게 된 나는 나의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단순히 경험하지 못함에 기인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상처받지 않아야 하는데 또 그렇지는 않다. 엄마와 아빠가 느꼈을 그 감정들을 나는 또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 역시 사람은 때가 되면 느끼고 알게 되는 감정들을 선행하지도 나머지 공부를 하지도 않고 딱 진도에 맞추어 경험하고 살아가기 마련인가 보다.
나는 작년에 직장생활 28년 만에 지사장으로 승진을 했다.
분명 너무 기쁜 일이고 학수고대하던 일인데, 초임간부 승진할 때보다 기쁘지 않았다.
아빠가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서툰 감정표현으로 "잘했다. 축하한다." 하시며 그저 "허허허" 웃으셨을게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렇다. 기쁜 일은 누구에게 자랑해야 더 기쁜 일인데,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진심으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없어서 그만큼 기쁘지 않았나 보다.
때가 되어야 알 수 있는 일들은 소중하다.
이제 나는 느낄 수 있을 때, 이해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진심으로 열심히 느끼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