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하기 어렵지만 꼭 해야 하는 "미안 다하"의 의미
오랜만에 예전에 쓰던 노트북을 열어보았다.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지난 몇 년간은 가족 병간호와 객지생활로 정말 여유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루하루 내 앞에 떨어진 일들을 그저 놓치지 않고 해내는 것만 해도 정말 버거운 생활이었다. 정말이지 겨우겨우 버틴 세월이다.
2011년이었던가? 내가 처음으로 간부로 승진해서 맡게 된 CS(고객만족) 직무의 특성상 직원들에게 직접 교육하는 일이 잦았다. PPT 교육자료는 폰트에 따라 다른 노트북에서는 글자가 소위 '깨지기' 때문에 그 상태로 교육을 하는 것은 왠지 준비가 안된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서 큰맘 먹고 나는 내돈내산을 했고 이게 바로 그 나의 첫 노트북이고 나의 첫 간부생활의 열정, 그리고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어린 시절의 사진과 영상 같은 추억들이 가득 들어있는 노트북이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어 파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05년 큰아이 세 살 때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과 영상들이 있는 폴더를 발견했다.
당시 유행하던 버즈 "겁쟁이" 노래를 앙증맞은 입으로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부르는 귀여운 동영상도 있고, 최애 동화인 "애벌레의 꿈"을 글자를 읽지도 못하면서 다 외운 채로 책장을 넘겨가며 읽는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를 나가려는 나를 따라다니며 울고 불고 하다가, 바닥에 엎어져 대성통곡하는 동영상을 발견했다. 언제인지 알 것 같다. 그즈음 승진시험을 보기 시작한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공부하러 도서관에를 매일 갔었다. 공부하러 나가려는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우는 아이의 모습을 신랑이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큰 아이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다. 큰 아이는 "내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우냐"라고 우습다고 했다. 그리고 우는 모습이 정말 못생겼다며, "나는 어릴 때 왜 이렇게 못생겼지?" 한다.
큰 아이 앞에서 나는 "그러게 못생겼다" 하며 맞장구를 치고 함께 웃고 말았지만 큰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에 네 마음속은 벌겋게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는 하루종일 어린이집에 있다가 겨우 몇 시간 엄마와의 시간을 보낸 후였다. 그리고 잠깐 뒤 또 엄마와의 이별을 해야 하니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을까? 그런 아이를 두고 진짜 야멸차게, 매몰차게 돌아서는 나를 동영상으로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마음이 무너졌었구나. 이제 그 모습이 눈에 보인다.
물론 그때도 저 요란한 이별을 겪고 도서관에 가면 혼자 구석에서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며 책장을 넘기곤 했다. 엄마라는 사람이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죄책감에 책에 있는 내용이 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피곤을 못 이겨 책상에 엎드려 잠깐 잠이라도 든 날에는 딸을 내팽개치고 공부하러 나온 주제에 잠이나 퍼잔 파렴치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다 때려치울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그 시절이 지나고 나는 승진을 했고 지금은 지사장이 되었다.
큰아이의 마음속엔 그때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어릴 적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 커다란 상실의 상처를 준 사람으로 남아있을까?
아니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에피소드쯤으로 그저 그렇게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무의식 중에라도 커다란 상실의 상처를 준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 같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삼 남매 중 막내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언니는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서 언제나 집안의 관심의 대상이었고 오빠는 그 시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소위 장손이었다. 그 밑으로 오빠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나는 그다지 내세울 명함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릴 적 언니와 오빠 생일이면 친구들을 불러다 항상 엄마는 생일파티를 해주셨지만 내 생일은 아빠의 생일과 며칠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항상 아빠 생일에 가족들끼리 외식을 하는 것으로 그냥 지나쳤다.
어릴 적 나는, 아니 자라서도 나는 그 일이 너무 큰 상처였다. 집안 사정이 뻔하여 "내 생일도 언니 오빠처럼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해달라"라고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언니와 오빠가 너무 부럽고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한 번도 표시 내어 나의 불만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세월이 얼마쯤 흐른 어느 날, 어떤 계기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엄마에게 그 일이 참 서운했었노라고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때 엄마는 그저 흘려들으신 듯, "그때는 다 그러고 살았다" 하시고 말았다.
어느 해인가 내 생일에 엄마는 우렁각시처럼 우리 집에 몰래 오셔서 생일상을 제대로 한 상 차려놓으시고는 "니 생일이라서 엄마가 저녁 해놨다"라고 하시고는 가셨다. 집에 가보니 전에 잡채에 샐러드에 갈비찜에....
제대로 생일상을 차려놓으셨다. 엄마한테 받아보는 생일상이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찌나 좋은지... 언니와 오빠가 내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엄마는 "내가 네 맘을 헤아리지 못하고 생일을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하실 용기는 없으셨나 보다 그저 생일상 한번 차려주시는 것으로 퉁치셨다.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내게 "미처 몰랐다.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하셨으면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그 말만으로도 벌써 서운한 게 사라졌을 것 같다. 옛날 분이신 엄마는 말대신 행동으로 미안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나도 큰아이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어릴 적 내가 자주 불안한 이별을 하게 한 것, 엄마와의 시간을 흡족하게 가져주지 못한 것이 그렇다.
어제는 동영상을 보고 커다란 죄를 들킨 사람의 심정이 되어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해야겠다.
내가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 큰 아이도 나의 말을 기다릴지 모를 일이다.
오늘은 큰 아이에게 이 말을 꼭 해야겠다.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그리웠던 너를 두고 엄마의 할 일을 하러 가버려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