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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나 소셋 Jan 26. 2024

흡족한 이별은 불가능하다.

가족과 이별의 순간, 준비되고 따뜻하며 분주하지 않은 이별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자꾸 어지럽다고 하셨다. 

달팽이관 이상인가 싶어 이비인후과를 다녀오시라고 했고 한 달 넘게 약을 먹고 병원을 다니셨다. 

어느 때는 좀 괜찮다고 하시다가 어느 때는 또 어지러워 일어나지를 못하시겠다고 하셨다. 

평소 불면증이 있으셨던 터라서 잠을 못 주무셔서 그럴 수도 있다고 수면제 처방이라도 받아서 좀 드시고 푹 주무시라고 권했다.


설날 한주 전에 나는 친정 근처에 있는 캠핑장에 아이들과 함께 놀러 갔다. 며칠 전부터 기운 없고 어지럽다는 엄마가 생각나 아빠와 함께 캠핑장으로 모시고 와서 숯불에 돼지고기를 구워 드렸다. 

맛있게 드시고 기운이 좀 나신다고 했다. 이제 좀 괜찮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뒤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이제는 아예 일어나 앉으시지도 못하고 심지어 먹는 족족 다 토하신다고 모시고 올라와야겠다는 거다. 분명 내가 구워드린 고기를 드시고 기운이 나신다 했었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나는 그때 아산지역에 근무하고 있는 터라 병원은 언니가 모시고 가기로 하고 저녁으로 언니집에 올라오셨다. 

병원예약 때문에 하루 이틀 기다려야 했었는데,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응급실로 모시고 갔다. 

응급실에서 CT를 찍었다.  뇌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정말 딱 그 말이 맞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다는 말 말이다. 

뇌종양이라니 우리 엄마가 뇌종양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믿고 안 믿고 뭐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먹는 족족 토하셨기 때문에 얼른 수술을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날짜를 잡아 종양 제거 수술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양을 제거하면 밥도 드시고 다시 걷기도 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무지함에서 기인한 헛된 희망이었다.


엄마의 종양 부위는 소뇌 근처였는데, 소뇌는 운동신경을 조절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수술할 때 일부 손상이 있을 수 있다고 하긴 했었지만 실제로 그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술이 끝나고 엄마는 보행기능을 상실하셨고, 음식물을 삼키는 기능도 손상이 있어 죽 이외 음식물은 드시기 어려웠다. 일주일 사이에 세상 활발하신 분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엄마의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휠체어에 모시고 가서 화장실 변기에 앉혀 드리면 스스로 대소변을 보실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력이 약해져서 기저귀를 찰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격이 밝고 쾌활하셨던 만큼 본인이 일어서서 혼자 생활할 수 없음에서 오는 충격과 스트레스가 너무 컸고 점점 성격이 괴팍해지셨다. 

항상 웃는 상이셨던 얼굴은 잔뜩 화가 난 얼굴이 되었고, 목소리도 쇳소리로 변해 항상 악을 쓰셨다. 


나의 사랑하는 엄마이지만, 나도 점점 힘에 부쳤다.

언니와 나는 육아휴직 한번 내보지도 않고 직장생활을 하던 터였는데, 도저히 엄마를 감당할 간병인이 없어 각각 휴직까지 내어서 엄마를 돌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점점 엄마를 돌보는 게 의무감이 되었고, 자꾸만 엄마에게 화를 내었다. 

나중에 후회하리라 생각했지만 당장 앞에서 고집부리고 잠도 자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엄마를 맞닥뜨리면 나도 함께 소리부터 질렀다.


어느 주말이었다.

작은 병실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돗자리와 불판, 소고기를 준비해 가서 요양원 주차장에서 돗자리를 깔고 소고기를 구워드렸다. 아프시기 전 캠핑장에서 고기를 맛있게 드시던 것처럼 그날따라 목에 걸리지도 않고 잘도 넘기셨고 빨리 더 구워달라고 하시며 참 맛있게 드셨다.

저렇게 잘 드시는 걸 보니 엄마도 점점 회복하시겠구나 안심했다.

토요일에 고기를 구워드리고 다음날 일요일이었다. 

그날은 아빠가 엄마를 담당하는 날이었다.

나는 집에서 월요일 회사에 가기 전 아이들 반찬을 만들어놔야 하기에 정신없이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걸려온 아빠의 전화, 아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돌아가시려 한다. 얼른 와라" 하신다.  

아득해졌다. 너무 힘들었어도 절대로 엄마가 돌아가시는 것으로 이 상황이 끝이 나리라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힘들고 힘들면 언젠가는 엄마가 다 나으시리라 생각했다.

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별을 준비하지 못했다.

가스불을 끄고 신랑에게 차키를 넘기고, 아이들에게 일단 라면을 끓여 먹으라 이르고는 출발했다.


가는 차 안에서 다시 걸려온 아빠의 전화 "엄마가 방금 돌아가셨다." 팔순 노인은 울고 계셨다.


어디서 들은 바로는 사람이 죽고 나면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감각기관이 귀라고 한다. 

도착해서 엄마에게 무슨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내려갔다. 그런데 생각이란 게 되지 않았다. 

내 사고기능도 멈춰버린 듯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도착해서 엄마에게 고생했다고 이제 아프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엄마와 이별을 한 후 나는 내내 후회했다. 

7개월이라는 간병의 시간 동안 나는 엄마와 내가 함께 나누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되짚어 보며 이땐 이래서 행복했고, 저땐 저래서 우리 정말 슬펐었다고 조근조근 서로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한 번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을 엄마와 함께 보내며 있었던 우리들의 시간을 흡족하게 곱씹어 나누지 못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싸우고, 얼마나 서운했고 또 얼마나 후회했었는지 서로에게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서로 이해하고 보듬고 울고 웃는 시간을 전혀 흡족하게 가지지 못했다. 

이렇게 후회로 남을 줄 알았다면, 진즉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이별을 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너무 컸다.


몇 해 후 잘 버티시던 아빠까지 암이라는 병에 걸려 투병을 시작했다.

이제는 마지막 순간이 오면 엄마처럼 허망하게 아빠를 보내지는 않으리라 맘속으로 열심히 다짐했다.

아빠와는 정말 후회 없는 흡족한 이별을 하리라.

하지만, 아빠의 마지막은 코로나라는 시대적인 재앙 때문에 더욱 함께할 수 없었다.

요양원으로 옮기던 마지막 날 침상에 실려 엘리베이터를 타시는 아빠를 본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빠 눈떠봐. 아빠 여기 병원 여사님이 아빠 잘 챙겨주시니까 잘 지내고 있어 주말에 올게"

아빠는 눈뜰 힘도 없어 보였다. 그 대신 내 맘이라도 편하게 하시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여 주셨다.

병원을 옮기고 일주일 뒤 내일이면 아빠를 보러 가는 금요일 밤 자정을 넘긴 시간에 아빠는 돌아가셨다. 

나의 다짐과는 다르게 엄마 때보다 더 준비하지 못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흡족한 이별, 준비된 이별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동안, 내가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서운한지 그때의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감정을 나누고 살아야 한다.

앞으로의 남은 나의 인생은 만남보다는 이별이 많을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 이별이 후회되지 않도록 나는 진심으로 느끼고 표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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