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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나 소셋 Feb 02. 2024

먹이려는 자의 끈질긴 노력과 결실

객지생활을 하면서 집에 남은 가족들 집밥 먹이기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

2014년 노무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나는 전주혁신도시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방이전이 결정되고 한 삼 년여의 기간이 있었다. 

당시 본사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사업소로 나가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불행하게도 나는 실패했다. 

2014년 5월 11일(날짜도 잊을 수 없다.) 우리 집 판교를 떠나 완주군 이서 전주혁신도시로 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큰아이 초등학교 5학년, 작은아이 일곱 살 호기롭게 나는 둘을 모두 데리고 내려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손이 많이 필요한 딸들이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유치원, 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전주에서 모르는 사람과 생활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나의 기러기 엄마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삼 년간은 집에 아이 봐주시는 분이 하루 열두 시간 상주하셨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작은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집 살림을 돌봐주시고 아이들을 케어하시는 아주머니는 솔직히 나보다 아이들을 더 알뜰 살뜰히 먹이고 입히고 하셨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 나는 승진을 했고 아주 조금 가까운 충남 아산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아주머니 월급도 부담이 점점 커지고 이제는 조금 가까워져서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 1번쯤은 집에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없는 본격적인 두 집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랑은 거의 아이들 먹이는 것에는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먹을 것을 마련해 놓고 손쉽게 꺼내어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놓고 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아주 칸막이가 촘촘한 반찬통을 샀다. 칸막이가 촘촘해 칸이 작고 여러 개여서 여러 개의 반찬을 조금씩 넣을 수 있는 것으로 골랐다. 주말에 이것저것 반찬을 해서 하루에 한 개씩 계산해서 최소 다섯 개 이상의 반찬통을 채워놓았다. 반찬의 가짓수는 열개 정도 해서 고루고루 겹치치 않게 넣어놓았다. 

그리고 일회용 과일 도시작 통을 사서 한 사람이 하루에 한 개씩 과일 도시락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반찬통 여러 개 꺼내놓지 않고 한 개만 딱 꺼내어 여러 개의 반찬을 먹을 수 있어서 애들이 잘 꺼내어 먹겠거니 하는 생각 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이들은 잘 꺼내먹지도 않았지만, 꺼내 먹더라도 먹기 좋고 맛있고 좋아하는 반찬만 쏙 골라먹었다. 일주일치 반찬을 만드느라 십만 원 이상 장을 봐 거의 하루를 음식 하는데 시간을 썼는데 주말에 와서 버리는 게 반이었다. 버리는 것이 아까워 자꾸 아이들에게 화를 내게 되었다. 안 되겠다 싶어 전략을 바꾸었다.


일명 "단탄지 전략"이다.

총 세 칸으로 구분되는 유리 반찬통을 사서 한 칸은 탄수화물(밥), 한 칸은 단백질(고기류), 한 칸은 반찬 또는 야채 과일 이렇게 크게 세 가지 구분을 가지고 칸을 채우기로 했다. 그러면 밥을 따로 데우고 반찬을 꺼내고 할 필요 없이 하나의 통만 척 하고 꺼내도 밥과 반찬에 후식까지 다 먹을 수 있지 않은가? 

다만 과일이나 야채는 꺼내기 쉽도록 소분 용기에 담아 그것은 꺼내놓고 나머지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도록 하였다.

반응이 좋았다. 이 방법은 한 사람이 일주일에 세 개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이 커가고 학원 끝나고 집에 와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점점 줄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가보면 한두 개 남아있거나 방학과 같은 때는 다 그릇이 비워있었다. 여러 가지의 반찬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시간과 노력도 덜 들고 남아 버리는 것도 줄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 일 년 동안 하니 메뉴의 한계에 부딪혔다. 점점 안 먹는 일이 늘었고 또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많아졌다.


이제는 밀키트를 사놓아 보기로 했다. 밀키트는 일단 대기업의 맛으로 맛은 보장되어 있고 또 조리도 간편하여 이제 대학생이 된 큰 아이나, 중학생인 작은아이도 충분히 해 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잘 꺼내 먹나 싶었는데 이 역시 질린단다. 점점 안 먹고 주말에 내가 먹는 지경이 되었다.


아.. 이제 방법이 없다. 사 먹는 것 밖에는 그런데 사 먹게 하기는 왠지 죽기보다 싫었다. 

어떻게든 집밥을 먹이겠다는 객지생활을 하는 엄마의 택도 없는 그 고집 때문에 하루하루 나도 아이들도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던 무렵 나는 다시 본사 생활을 접고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지사로 오게 되었다.

나의 소원인 아침밥 차려주는 엄마가 드디어 된 것이다. 

저녁에 재료를 대강 준비해 놓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김밥도 싸고, 전도 부치고, 잡채도 하고.... 따뜻한 밥과 반찬을 드디어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었다. 아침에 학교에 늦어 뛰어가는 날이 아니면 아이들은 밥을 잘 먹어주었다. 생전 아침밥이라고는 배 아파서 못 먹는다던 신랑도 군소리 없이 차려놓은 밥을 싹싹 비우고 가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만의 밀키트를 만들어 놓던 그 시절에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아침을 먹지 않던 신랑이었다. 


그렇다. 결국은 직접 하루하루 해 놓는 밥에 당할 밀키트는 없었다. 

그동안 내가 만들었었던 밀키트는 내가 마음이 편하려고 나는 밥을 해놓았다고 떳떳하게 말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만 해도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음식을 데워 먹으면 맛이 덜한데, 아이들은 오죽했으랴


결국 먹이려는 자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은 직접 매일 아침 해먹이는 집밥이었다.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을 차가운 밀키트를 데워먹었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먹이느라 바쁜 것도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우리 조직의 특성상 나는 또 언제 어디로 발령이 날지 알 수 없다.

내 몸은 아무리 피곤해도 먹이려는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바로 지금 바로 오늘이 행복하다.



그동안 엄마의 차가운 밀키트를 먹어준 아이들과 신랑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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