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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Jun 27. 2021

묵은 것이 아름답다(1)

(1) 나는 왜, 어디로 떠나는가?

  '묵다'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3가지다. 첫째, '나이 들다', '오래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묵은 장맛, 묵은 상처, 백년 묵은 여우와 같이 사용된다. 둘째, '묵다'는 '머무르다'는 뜻도 있다. 마지막으로, '묵다'는 '먹다'의 경상도 사투리다. '밥 묻나(먹었냐)?'는 경상도에서 가장 흔한 인사말이기도 하다.     


  묵은 사람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 통계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11월 기준으로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이 전체의 14%를 넘었다. UN이 정한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6.25 전쟁 이후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거나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의 역사도 어느덧 70여 년에 이른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묵은 사람, 묵은 집과 다리와 건축물, 오래된 문화유산과 도시, 오래된 음식과 노래와 나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필자가 그냥 '오래된 것', '묵은 것'을 칭송하고 섬기자는 꼰대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뽑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법고창신'은 옛 것을 토대로 새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초정 박제가(1750~1805)의 문집(초정집) 발간을 기념해 써준 글에 들어있다. 재기발랄하고 신선한 문체의 '열하일기'를 써서 요즘으로 치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 철학이기도 하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야말로 입고출신(入古出新), 즉 옛것을 통해 새것을 창출한 대표적 사례라고 얘기한 바 있다. 어릴 적부터 명필로 이름이 났던 추사는 예서, 전서, 해서, 행서, 초서와 같은 오래된 중국의 서체를 갈고 닦은 후에 그 틀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의 새로운 서체, 즉 ‘추사체’라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냈다. 즉, 오래된 것은 낡고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것은 역설적으로 새것이다(old is new).      


  20여 년 전에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책을 낸 바 있다. 슈마허는 당시의 사회가 무조건 큰 것, 큰 기업, 큰 나라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메시지를 그 책에 담았다. 슈마허는 적정기술을 지지했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슈마허의 글과 정신을 이어받아, 나는 이제 ‘묵은 것이 아름답다’(old is beautiful)고 해야겠다. 한 우물을 오래 깊이 판 기업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로 경쟁우위를 유지하고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헤르만 지몬이 얘기했던 ‘히든챔피언’의 여러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한 우물을 오래 파는 것이다. 결국,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이고, 혁신적이고, 가치 있는 것이고, 그 속에 지속가능한 발전의 해법이 숨어 있다.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술을 토대로 고부가가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묵은 것’은 한물간 것이나 낡은 것이 아니고 혁신적인 것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곱씹어보면 묵은 음식이 맛있고, 묵은 도시가 아름답고, 묵은 사람이 향기롭고, 묵은 음악이 감미롭다. 오래된 한옥이 향기롭고, 묵은 김치가 맛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묵은 기업이 혁신적일 수 있다는, 법고창신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기업이 바로 GE(General Electric)다. GE는 1892년에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전기회사다. 전구, 가스터빈, 가전, 철도, 항공기 엔진 등을 만들던 미국의 대표적 제조업체다. 그런 GE가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디지털’, ‘산업인터넷’, ‘소프트웨어’ 분야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세계 10대 소프트웨어 회사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거대한 공룡 GE가 핵심 사업부 매각을 통해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오래된 것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해방과 6.25 전쟁을 거쳐, 서양 문물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의 전통문화는 낡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국악과 동양화, 전통 무용과 악기는 서자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오래된 것은 바꿔야 할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새것이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나이 오십만 넘으면, 직장이나 가정에서 퇴물 취급을 받기도 했다. 30년 된 아파트를 손봐서 다시 쓸 생각은 안 하고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부숴버렸다. 전통과 문화는 물론 사람과 물건도 쉽게 쓰고 버리는 바람에 낭비가 심했다.    

  

  하지만, 오래 묵은 것일수록 더 귀하고 더 비싸지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지혜나 경륜도 오래 묵을수록 빛을 발한다. 아파트도 제대로 된 절차와 재료로 시공하면 100년을 쓸 수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교수의 정년이 없다.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계속 강의와 연구를 할 수 있다면, 70세 넘어서까지도 교수로 일할 수 있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가 문제다.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왜, 어디로 떠나는가? 필자는 2021년 여름부터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떠난다. 여행을 시작한다. ‘묵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현장을 찾아간다. 보고 느끼고 기록하려 한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축물, 문화유적, 나무, 장소, 음식, 책, 노래 등 찾아갈 곳은 무궁무진하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 시작하기가 두렵고 어렵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관성이 작동한다. 당분간 지속하는 힘을 갖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시 ‘Stufen’(계단)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떠나는 길은 전라북도에서 시작한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와 문화유적과 나무와 풍경들이 두루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침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던 ‘전라북도 한 달 여행하기’ 프로그램에 손을 들었다. 전북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이어서 전남, 경남, 경북, 충남, 충북, 강원, 경기, 제주, 서울, 이런 식으로 전국을 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길게 보고 서두르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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