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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Jul 07. 2021

묵은 것이 아름답다(2)

(2) 익산의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

  익산은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여 교통이 편리한 도시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KTX가 개통되면서 용산역에서 익산역까지 1시간 25분이면 도착한다. 조선시대에도 전라도의 관문이었던 여산이 익산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 있었고, 여산에는 역참과 군영이 있었다. 모름지기 전라도 여행의 출발은 익산이다.     


  여행을 가면 도심 한복판의 번잡한 호텔이나 모텔에서 묵지 않고, 한옥호텔이나 한옥체험관처럼 한적한 곳을 이용한다. 익산역에서 북쪽으로 이십여 분 차를 몰고 가면 함라 한옥체험관이 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만큼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현대식 한옥이라 불편한 점은 없다.      

  다음 날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여행지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꼬끼요~ 소리에 눈을 떴다. 닭이 앞장을 서니 다른 새들도 같이 울어댄다. 산비둘기, 참새, 제비, 뻐꾸기, 뜸북새, 까치 등이 아침 준비를 하는 것인지 떠들썩하다. 동이 트면서 문살과 한지에 빛이 배어 들면서 방 안이 환해졌다. 시골 초가집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어두커니 살았던 1970년대의 어릴 적 고향 집이 떠올랐다. 오래된 도시로의 여행이 주는 여러 선물 중의 하나다.      

  익산에 남아있는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을 꼽아본다면, 첫 번째는 미륵사지다. 미륵사는 7세기 초에 백제의 제30대 왕이었던 무왕 시절에 세워졌다. 천사백여 년 전의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법당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시로서는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 사이 대웅전 등 전각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 당간지주 2기뿐이다.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텅 빈 채로 서 있다.      

  4년여의 작업 끝에 1993년 복원된 동탑에 대한 후학들의 평가는 박하다. 근거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졸속으로 복원하는 바람에 미륵사지의 고풍스러운 맛이 드러나지 않고,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미륵사 서탑은 절반가량이 무너져 내린 상태로 6층까지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일제 강점기에 탑의 무너진 쪽을 시멘트로 덮어놓았는데, 그 부분을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걷어냈고, 무너진 상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아름답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파괴된 상태 그대로 아름다운 것처럼 익산의 미륵사지 서탑도 그렇다. 석탑인데도 목탑처럼 부드럽게 곡선의 느낌을 살렸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여름의 미륵사지는 아침 일곱 시에 가도 너무 늦다. 용화산을 넘어온 여름 해가 벌써 이글거린다. 무왕 시절에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는 법당과 탑과 절 입구를 연결하는 회랑이 있었다고 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한여름 땡볕이더라도 미륵사를 둘러보는 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 동탑과 서탑을 복원했으니, 대웅전 등 전각들도 복원하고, 그늘을 만들어 줄수 있는 회랑도 복원하기를 기대해 본다. 섭씨 30도 안팎을 넘나드는 무더운 여름에 향학열에 불타는 역사학도들이나 불심 깊은 신도들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미륵사 동탑과 서탑을 둘러보겠는가? 보통의 여행객이라면 멀리 미륵사지 정문 입구에서 동탑과 서탑을 배경으로 인증샷 한번 찍고 떠나는데 5분 이내로 소비할 것이다.  

  백제의 무왕은 의문부호가 많다. 무왕의 아버지는 29대 법왕이라는 설도 있지만, 27대 위덕왕이라는 설도 있다. 그 당시 백제의 수도는 부여였는데, 왕족이었던 서동은 왜 어린 시절을 익산(당시 ‘금마’)에서 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어 먹으면서 살았을까? 신라 선화공주와의 러브스토리는 어디까지가 팩트일까? 나제 동맹이 깨지고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신라와 백제의 왕족들이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2009년 미륵사 서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서탑을 세운 사람이 백제의 귀족이자 고위 관료였던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당시 무왕의 왕후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의 서동요는 무엇이고, 선화공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왕의 재위 기간이 41년으로 상당히 길어서, 왕비가 신라에서 건너온 선화공주 한 명이 아니었을 수 있다. 백제의 좌평 사택적덕의 딸도 나중에 왕비로 들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원래 미륵사의 탑이 3개, 법당이 3개였다고 하니, 왕비가 세 명이었을 수도 있다. 그걸 밝히는 일은 역사학자들의 몫이고, 상상하고 즐기면서 여행을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더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도 있다. 이를 다룬 오페라나 뮤지컬이나 영화가 있지만,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어보면 좋겠다. 2004년부터 서동축제가 해마다 개최되고 있지만, 더 많은 아이디어와 콘텐츠가 채워지면 좋겠다. 영호남 화합의 의미도 살려서 두루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미륵사지를 떠나서 두 번째로 간 곳은 익산의 북동쪽에 위치한 나바위 성당이다. 나바위성당은 서양의 건축양식과 한옥의 건축양식이 동시에 반영된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서양과 동양이 공존하는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축물, 아주 귀한 건축물이 바로 나바위 성당이다.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중국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19세기 중반(1845년)에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곳이 지금 나바위성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걸 기념하는 취지에서 1906년에 베르모렐 신부가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07년에 목재로 된 건물을 세웠다. 1916년에 벽돌로 된 종탑을 증축했고, 흙벽을 벽돌벽으로 개조했고, 회랑도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개축했고,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처럼 아름다운 성당으로 자리 잡았다. 성당 옆에 금강과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나바위가 있고, 그 위에 망금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를 세웠다. 당시 서양인 신부들과 주교들이 피정을 와서 쉬어갔다는 곳이라고 한다.      


  익산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곳을 하나 더 꼽으라고 한다면, 원불교 익산성지다. 1924년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립하여 열반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그 당시의 일본식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종법실, 송대, 공회당 등의 건물이 오래되고 아름답다. 아울러, 주변의 나무와 꽃과 잔디가 정성껏 관리되어 있어서 오래된 건물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정성을 들여 아름답고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음을 누구나 금방 느낄 수 있다. 오래된 건물이 아름답게 살아남는 비결은 바로 후손들의 정성 어린 손길과 눈길이다.      

  여행을 조금 더 여유 있게 하시는 분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역 가운데 하나인 춘포역(1914년 건축)도 방문해 보기 바란다. 간이역이었고 그러다가 폐역이 되었기에 너무 초라해서 실망하실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알려드린다. 과거의 화려함과 부산함은 사라져 버리고, 쇠잔하고 퇴락한 상태 그대로를 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예상하고 준비했던 것과 달라지는 게 여행이다.

  춘포역은 일제 강점기에는 대장역이었고, 대장(大場)이란 큰 농장이라는 뜻인데, 구마모토와 같은 일본인들의 큰 농장이 다수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던 구마모토 료헤이는 스스로 부자는 아니었지만, 주식회사 제도를 농장 경영에 도입하여, 일본의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당시 식민지 조선의 농토를 싸게 대량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생산성이 높은 호남평야의 쌀을 싸게 생산해서, 전쟁 중에 쌀이 부족하고 비쌌던 일본에 비싸게 팔아서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구마모토는 자신을 조선의 경제총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어서, 역사 교육과 교훈의 현장이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

  이십 세기 초반에 미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원형 그대로 익산에 남아있다. 두동교회다. 1923년 당시 해리슨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 남녀 신도들을 좌우로 나눠서 앉도록 기역(ㄱ) 자 형태로 된 한옥 예배당을 세웠다. 남녀유별이라는 우리나라 관습에 따라 예배당을 기역자 형태로 지음으로써 처음 기독교를 접하는 신도들의 거리감을 줄여보려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런 독특한 모양의 한옥 교회가 우리나라에 두 군데 남아있다.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와 익산에 있는 두동교회다. 익산의 두동교회는 지붕이 함석으로 되어 있다. 옆에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근사한 두동교회보다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두동교회 구관이 훨씬 더 아름다웠다. 신관과 구관을 동시에 비교해서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을 정성껏 가꾸고 보존하여 후대에 넘겨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춘포역과 두동교회는 그런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다른 한편으로 더 많은 기대와 희망을 품고 전라북도 한달 여행하기의 첫번째 방문지 익산을 떠났다. 익산 쌍릉이 무왕과 왕비의 묘라는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으므로 이를 토대로 더 많은 이야기와 관광 인프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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