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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래불사춘 Sep 08. 2021

아파트 한채 정도는 있지만(2)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주르륵. 방 한복판으로 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야 깨닫고 꼭대기층에 살던 집 주인을 즉시 소환했다. 한밤중에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위층 수도 계량기를 잠그고 나니 누수는 곧 사그라들었다. 친구 집으로 며칠간 피신했고 곧장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다. 위층  바닥을 다 파보았어도 원인을 못 찾았다는 집주인과 이사비 지원금액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절충 금액이 이사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다음 행선지는 군자동 6000만원 원룸 전세. 주방이 작게나마 분리된 형태였고 방과 화장실은 가격에 비해  넓었다. 어린이대공원 역과 군자역 사이 능동교회 뒤편의 주택가였는데 아직도 이 동네가 살기 가장 쾌적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혼자 살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주저 없이 군자동, 능동을 선택할 것이다. 어린이대공원이 코앞에 있고 능동로 양쪽의 보도 폭이 넓어 걷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한겨울 수도관이 얼어 드라이기로 녹이느라 고생한 적이 있긴 했지만 무난한 생활이었고 여기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집으로 보유한 돈 8천만원에다 최대 7천만원을 대출받아 1억 5천 수준의 투룸을 구하려고 돌아다녔다. 군자동의 이미지가 좋아 그 건너편 중곡동을 알아봤으나 대로변 건너편 동네는 기대만큼 쾌적하지 않았다. 중곡동이 마뜩잖았던 장모님은 마침 처이모가 소유한 집 한 채가 비어 있다며 그곳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연식이 있긴 했으나 34평 아파트였다.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 신혼집으로 분에 넘치는 조건이었다. 1억 5천의 전세로 기한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 3번 출구로 나와 걷다가 우회전하면 엄청난 경사의 오르막길이 있다. 그 위에 위치한 아파트였는데 겨울에 눈길에 두어 번 넘어진 것을 빼고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집이 넓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좁혀서 이사가기는 어렵다. 그 무렵 스멀스멀 집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자산이 너무 없었다. 순수자본 1억 남짓으로 무리하게 대출을 받기는 싫었다. 부동산 경기가 안 좋을 때라 여기저기 미분양이 속출했다. 사더라도 가치의 하락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도 서울 근교 신도시의 분양은 계속되었고 그중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전적으로 시골에 홀로 있는 엄마가 기차를 타고 오기에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었다. 청량리 역에 내리면 같은 플랫폼에서 전철로 갈아타 몇 정거장만 오면 되는 곳이다. 결혼 후 계속 처가 근처서 살았기 때문에 엄마가 왕래하기 부담스러웠을 거란 생각을 한참 동안 하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30평 아파트였고 2억 8천만원 수준의 분양가도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예상과 달리 집을 소유하게 되었다.(서울은 아니었지만.)


부동산이라는 것은 참 이상했다. 청약에 당첨된 직후부터 계속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1억, 2억, 3억.... 감가상각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재화. 그때부터 아파트값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시세 확인을 하고 다른 신도시의 시세 추이는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의 전망은 어떨 것인지, 예정된 호재는 없는지, 주관심사가 집값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불행히도 우리 동네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근교 신도시들에 비해 가격이 가장 덜 오른 지역이다. 지역의 확장성이 낮았고 재정이 열악한 시의 행정적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행인 것은 절대적인 금액이 올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우리 집이 얼마 오른 것보다 다른 동네 집들이 더 많이 오른 것을 보고 박탈감을 느끼는 시간훨씬 았다. 우리도 올랐지만 다른 데는 더 많이 올랐기 때문에 체감하는 집값 상승의 효과는 전혀 없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며 어떻게든 상급지 아파트이사하여 자산을 불리는 이 유행이었다. 어떤 때는 모든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소름 돋기도 했다. 나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 레이스에서는 도태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비전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유독 덜 오른 우리 집값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집을 팔고 집값이 더 싼 동네로 이사를 가면 된다. 그러면 집값의 차액이 불로소득으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한 칸을 더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아등바등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나로선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실행에 옮겼다. 단 조심스럽게.


수도권을 벗어나 정착한 곳은 강원도 춘천의 단독주택단지이다. 온 가족이 새로운 환경을 즐기고 있다. 집은 더 넓어지고 마당도 생겼다. 아이들은 본능대로 거침없이 뛰어다닐 수 있다. 아파트는 팔지 않고 전세를 주었고 우리도 세입자로 살고 있다. 전세금 차액으로 금전은 일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나름의 기대한 효과가 있는 셈이었다. 평생 이곳에 산다고 가정하고 아파트를 처분하면 이제 영구적인 여유자금이 얼마즘 생기겠지. 사회에 통용되는 경제논리에 완전히 반하는 사고로 삶의 전환을 이루었다.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춘천이 마음에 들어 계속 이곳에서 삶을 이어가겠다는 결정은 했지만 우리 아파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아파트 한채 정도는 가진 사람으로 계속 사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앞으로도 집의 가격보다는 가족의 보금자리로서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결정들만이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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