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갈치와 다리
애초에 엄청난 여행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둘째 날에는 바다 맞은편에 위치한 수족관에 갈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딱 적합한 곳인데 차 없이는 가기가 불편한 곳이라 미리 자동차를 렌트했다. 자동차를 렌트한 김에 돌아오는 길에 코스트코에 들르기로 했다. 다른 나라에 가면 코스트코에 가보는 것이 우리 가족의 재미 중 하나라서. 그 두 가지 말고는 별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시간이 남으면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생겼다.
다른 곳은 안 가더라도 반드시 찾아가야 할 곳이!
와이프와 1~3번 녀석들은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한국으로 먼저 들어갔다. 휴가가 그만큼 많지 않은 나는 2주 정도 있다가 합류해야 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집에 없을 때 몇 년 동안 미뤄놓았던 집안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마당 데크에 페인트(Stain)를 칠하는 일이었다. 적어도 25년 가까이 되었을 테니 그동안 군데군데 손 볼 곳이 있었다. 작년에는 데크보드에 구멍이 나서 보드들도 몇 개 교체하고 계단도 망가져서 새롭게 설치하기도 하였다. 비와 햇볕에 노출되어서 나무가 손상되거나 썩는 것이 문제인데 페인트를 칠하면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다.
사실 6년, 전 이 집으로 이사를 들어올 때 데크에 페인트를 칠하려고 페인트까지 다 사놓았다. 페인트 칠을 위한 밑작업까지 다했는데 결국 다른 할 일들에 밀려서 페인트를 칠하지 못하고 말았다. 모든 일이 한 번 때를 놓치면 다시 시작하기 쉽지 않은데 페인트 칠은 특히나 더 그렇다. 밑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데크에 페인트를 칠하려면 우선 세척제를 뿌리고 고압세척기(Pressure Washer)로 청소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물기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벨트샌더(Belt Sander)로 표면을 정리해 주어야 한다(사포질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페인트 칠하는 것보다 이 작업이 귀찮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리고 당장 페인트 칠을 하지 않는다고 크게 불편한 것은 없기 때문에 끝없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하실에 내려갈 때마다 한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페인트를 때문에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하지만 드디어 때가 되었다.
어차피 혼자 집에 있으면 별로 할 일도 없고, 마침 집 안에서는 아들 친구 아빠가 한창 욕조를 설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땡볕에 밖에 나가 데크를 세척하고, 샌딩을 하고, 페인트 칠을 했다. 날씨가 워낙 더웠던 탓에, 안에서 작업을 하던 아들 친구 아빠가 종종 밖에 나와 내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들어갔다. 그래도 삼일에 걸친 작업 끝에 페인트 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6년 전 사놓은 페인트가 문제가 없을까 걱정되었지만 밀봉이 잘되어 있었는지 별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데크에 페인트 칠하는 것만큼이나 숙원 사업이었던 것이 바로 2층 화장실 리노베이션이었다. 이 집의 전주인은 부유했는지 집을 참 잘 꾸며놓고 살았다. 그런데 오직 2층 화장실만 옛날 상태 그대로였다. 많이 낡아서 이사를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만 굴뚝같았지 막상 시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욕조를 교체하는 것은 혼자 하기에 너무 난도가 높았다. 우선 욕조 자체가 혼자서 들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드라이월도 잘라내야 하고, 사이드월도 설치해야 하고, 배관 작업도 해야 하는 등 온갖 일이 많기 때문에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시작을 하기에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마침 아이키아에서 세일을 하길래 정말 큰 마음을 먹고 리노베이션에 필요한 자재들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재들을 받자마자 코로나로 모든 활동이 제한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욕조를 살 수도 없거니와 함께 욕조를 날라 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 불타올랐던 리노베이션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한 번 때를 놓지니 4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하에서 잠들어 있는 자재들 가격만 백만 원 이상인데, 잘못하면 다 똥이 되겠다 싶었다. 그때 아들 친구의 아빠가 집안 수리를 부업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욕조는 이 아저씨에게 맡기자! 그래야 이 오랜 여정도 끝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아저씨가 욕조를 설치하는 사이 나는 화장실의 나머지 부분들에 집중했다. 우선 세면대를 조립했다. 예전에 같은 제품군의 세면대를 설치한 적이 있어서 조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조립을 하다 보니 세면대 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면대는 다리 없이 벽에 고정시키는 형식이지만, 벽이 하중을 견디기 어려운 경우 별도로 다리를 구입해서 설치할 수 있다. 다리가 없으면 세면대가 공중에 떠 있기 때문에 멋져 보이기는 하지만, 안전을 생각해서 그냥 별도로 다리를 구입해서 설치를 했었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4년 전 세면대를 살 때 다리는 주문하지 않았었나 보다.
뭐, 곧 토론토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아이키아에 들러서 사 오면 되겠지 하고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이 세면대와 다리는 단종되어 더 이상 팔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2020년에 산 세면대니 단종되어도 할 말은 없지만 난감했다.
혹시나 해서 미국 아이키아를 검색해 보니 오하이오인가 어딘가에 몇 개가 남아있었다. 과연 다리를 사러 오하이오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말이 오하이오지 그걸 사려고 10시간을 운전해서 거기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이번에 한국에 가니까 한국 아이키아도 한 번 검색을 해보자! 한국에서는 아예 판매한 적이 없는지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이번에 일본에도 가는데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오, 이럴 수가!!! 마침 후쿠오카 아이키아에는 재고가 10개 정도나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 아이키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을 포기하더라도 여기만은 반드시 찾아가야 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검색해 보니, 이럴 수가!! 우리 여행의 둘째 날 동선이 이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오른쪽 핸들을 운전하는 것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운전을 거칠게 하는 편이 아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깜빡이 레버에 적응하는 데는 항상 시간이 조금 걸린다. 깜빡이를 켜려고 하면 여지없이 와이퍼를 켜고 말았다.
이날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더웠다. 자동차 온도계를 보니 아침 10시인데도 35도였다. 햇볕은 쨍쨍한데 습도는 높아서 과연 내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대단하기만 했다. 그래도 이날은 자동차로 움직여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이 자동차에는 에어컨도 달려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53도라도 문제없다(참고로 내 차에는 에어컨이 없음).
수족관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있으니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라면 한 번 가볼 만하다. 돌고래쇼도 있고, 펭귄쇼도 있고, 고래가 수영을 하는 것을 보면서 밥을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갈치가 인상 깊었다. 내가 본 갈치들은 시장에서 누워있거나, 15cm 정도로 토막이 나서 슈퍼에 누워있거나, 빨간색 찜 요리 속에 들어 있거나, 식판 위에 구워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살아있는 갈치라니!!! 더욱 싱싱하고 맛있어 보였다. 내가 잘 알지. 저 녀석의 등뼈는 잘 발라내야 한다는 것을.
갈치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는 꿈에도 그리던 아이키아로 향했다. 아이키아는 뭐 그냥 아이키아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냥 밖은 엄청나게 더운데 안이 시원해서 좋았다.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없으니 바로 화장실용 가구 코너로 향했다. 하지만 이리 찾아봐도 저리 찾아봐도 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점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다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점원은 컴퓨터로 조회를 해 보더니 이것은 계산을 하고 나서 서비스 데스크로 가서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여기에는 정말 다리가 있군요! 이것을 찾아 캐나다에서 14시간을 날라서 왔어요'라고 농을 쳤다. 놀랍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 일본어가 거지 같아서 잘 못 알아 들었거나,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어떤 미친 인간이 이 다리 하나 사려고 캐나다에서 후쿠오카까지 오겠는가?
집으로 돌아가 꿈에도 그리던 화장실 리노베이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참 오래 걸렸고, 먼 길을 돌아왔다. 하지만 이 다리가 없었다면 화장실의 아름다움은 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