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아침 일찍 1번 딸 녀석과 산책을 하다 스타벅스에 들렀다. 여느 때처럼 지역 한정 머그컵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어느새 일본도 미국과 캐나다처럼 'Been There Series'의 머그컵을 팔고 있었다.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것 같은 그림들도 있었고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그림들도 있었다. 어쨌든 예전에 샀던 컵보다는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컵이니 하나 사들고 가게를 나왔다.
예전 후쿠오카 머그컵을 보면 전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Fukuoka'가 아니라 'Wuhan'이라고 적혀있어도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스타벅스 로고가 없었다면, 관광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머그컵과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나마 반대쪽에 그려진 커다란 밧줄을 보니 예전에 혼자서 가봤던 카라츠 쿤치(唐津くんち)가 생각났다. 카라츠 쿤치는 매년 11월, 후쿠오카 서쪽에 위치한 사가현 카라츠에서 벌어지는 축제이다. 동네 사람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히키야마, 曳山)를 끌고 지나가는데, (나는 알 수 없는) 역사적 가치로 인하여 1980년 일본 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치고 나발이고 내가 장담하건대 재미는 없다.
2006년 11월, 시내 기숙사에 살고 있던 다른 유학생들과는 달리, 4km 반경으로 학교 건물을 제외하고는 논과 밭밖에 없는 외딴 기숙사에서 나 혼자 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내가 사는 동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연휴였기 때문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 아니, 같이 갈 사람은커녕 평소에 이야기를 할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나와 같은 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간 사람이 저 멀리 시내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갈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타깝게도 교통비가 비싸서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결국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30분을 달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전철을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리니 카라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기록을 보니 차비가 편도 720엔이었다. 아! 그 친구는 교통비가 아까워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랑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같이 가지 않은 것이구나!
아무튼 나는 혼자였지만 사람은 참 많았다.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히키야마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카라츠 쿤치에서는 총 14대의 히키야마가 지나간다. 히키야마를 앞에서 끄는 사람, 뒤에서 미는 사람,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 등등 한 대에 200명은 족히 매달려 있었다. 카라츠가 얼마나 큰 동네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동네 청년들이 나와서 히키야마를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문제는, 그 많은 형들이 발산하는 암내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냥 그 괴상한 히키야마를 끌고 쭉쭉 지나가주면 참 좋겠는데 앞서 가는 히키야마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내 앞에서 자꾸만 멈춰 섰다. 다시 출발할 때 형들이 영차 영차 하며 힘을 발산하는데 그에 맞추어 엄청난 암내도 함께 발산되었다.
차라리 히키야마에 배터리를 달아 전기야마로 만들면 형들도 편할 테지만 민속문화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형들은 올 11월에도 하나의 히키야마에 200명씩 매달려 밧줄로 당기겠지. 여전히 암내를 풍기며.
그에 반해 Been There Series로 바뀐 후쿠오카 머그컵은 후쿠오카'적'인 것들을 잘 그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후쿠오카시(市)는 아니고 후쿠오카현(縣)을 대표하는 그림들이다.
우선 라멘, 딸기, 꼬치, 멘타이코(명란젓), 그리고 포장마차인 야타이(屋台)가 보인다. 후쿠오카에 딸기와 꼬치(무슨 꼬치인지는 모르겠다)가 유명한지는 처음 알았다. 나카스에 많이 있는 야타이는 보기는 많이 봤지만 가본 적은 없다. 돈 없는 대학생이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물론 같이 갈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후쿠오카의 돈코츠 라멘은 이제는 너무 유명해서 언급을 할 필요도 없다. 다만 후쿠오카에 처음 갔을 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사람에게 라멘은 어디가 맛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냄새가 강해서 호불호가 강하긴 하지만 '간소(원조) 나가하마' 라면을 말해 주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라 그냥 가봤다. 다른 돈코츠 라멘을 아직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이런 맛이구나 싶었다. 라멘을 먹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세 명 들어왔다. 그렇게 한국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는데 이런 곳까지 찾아오다니,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라멘을 먹다가 국물을 마시고 싶었는지 주인아저씨에게 '스푼'을 달라고 했다. 아저씨가 무엇을 달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참 '스푼' '스푼'을 반복한 끝에 아저씨가 '오, 스푸-운'이라고 하더니 수저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아니 어떻게 영어로 '스푼'을 모를 수 있냐고 웃었다.
하지만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은 스푼이 아니라 '렌게(れんげ)'니까.
나머지 그림들은 야나가와 뱃놀이, 키타큐슈의 사라쿠라 산, 이토시의 사쿠라이 후타미가우라 등이다. 모두 가본 적은 없는 곳들이다.
글을 쓰면서 하나 발견한 점은 내가 혼자 살았던 기숙사에서 후타미가우라가 엄청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큰 암석 두 개가 나란히 있어서 부부 암석이라 불리는 것이 있는 곳인데 자전거로 30분만 가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어느 주말에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그 근처까지 가본 적은 있다. 그런데 여름을 지나서 가본 것이라 해수욕장에는 사람도 없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아서 너무 을씨년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흑, 조금만 더 힘을 내서 평생 다시는 못 가볼 곳에 다녀올걸. 뭔가 하나도 아쉽지 않으면서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