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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Jan 20. 2024

할아버지의 인터뷰

할아버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다.

“동생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다.” 

“일본인 검사가 ‘옥에서 나가면, 또 만세를 부를 거야?’ 하고 물었지. 너희 작은할아버지(龍자 器자, 1897-1933)는 ‘네놈들이 무엇 이관데 만세를 부를지 말지를 묻는 거냐? 네 놈들만 너희 나라로 돌아가면 만세 따위 부르지 않는다. 하나, 너희 놈들이 이 땅에 있는 이상,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만세를 부를 거다.’라고 삿대질을 하며 악을 써 댔다. 그러고는 죽을 만큼 맞았지. 몇 차례 맞고 나하고 같이 2년 형을 받았다. 매 맞은 후유증으로 2년을 못 견디고 중도에 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참된 애국자였다. 글도 잘하고 식견도 높아 검사에게 조목조목 따져 주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고 속 시원하고 부러웠다.”


 1960년 3월 1일,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지 7년이 채 안 되고,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이듬해에는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꽃샘추위 찬바람이 소매 끝으로 스며드는 봄날, 3,1절 기념행사가 전주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에는 정부 행사에 학생을 동원하는 예가 많았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공설운동장에는 학생, 사회단체, 공무원 등이 모여 있고, 단체마다 각양각색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3.1 정신 이어받아 북진통일 이룩하자> <잊지 말자 6.25 쳐부수자 공산당> 본부석에도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기마경찰도 참석했다. 모자의 배지와 견장, 휘장이 번쩍거리고, 가죽 장화도 잘 닦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키가 크고 위엄 있는 말의 발목에도 흰색 붕대를 감아 산뜻하고 날렵했다. 말 위의 경찰도 젊고 곧은 허리를 곧추세워 날아오르는 제비 같았다.

 

 단상에서는 전주시장 기념사, 학생대표의 축사, 삼일운동 대표 기념사 등이 있고 감사장 수여가 있을 때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깨끗한 한복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노인이, 당시 이주상 전주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있었다. 그 노인은 바로 이 성자 기자 (李成器. 1890-1978) 71세의 우리 할아버지였다.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럽던지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가슴은 쿵쾅거렸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 KBS 라디오 뉴스에 할아버지의 인터뷰가 소개되고 있었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리니 반갑고 신기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렇게 상장과 기념품을 받고 보니, 먼저 가신 많은 의사와 열사님들께 미안하고 면목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고향인 전북 남원 사매면 대신리 이장이셨다. 전주 이가 씨 집성촌이던 마을에서도 만세를 부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남원의 유지들에게 파발을 돌려 많은 사람의 참가를 독려하는 한편, 할아버지 집 사랑방에서 태극기와 플래카드, 깃발 등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남원 장날인 4월 9일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고, 2년 형을 받아 경성감옥(당시, 마포형무소)과 대구감옥으로 옮겨가며 복역하였다. 서울에서 3월 1일에 시작한 만세운동의 열풍은 한 달 만에 지리산 자락 남원까지 불어왔다.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불을 붙일 때는 성냥개비 하나였지만,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고 삼천리강산을 들끓게 했다. 


  1919년의 기미 독립 만세운동으로, 형을 받은 사람들의 형량을 살펴보면 할아버지의 활약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20년 1월에 ‘조선총독부 법무국’에서 발표한 ‘망동사건처분표’에 의한 내용이다. 2년 이상의 징역 670명, 5년 이상 43명, 10년 이상 21명, 무기징역 5명이다. 다음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독립운동의 횃불을 처음 올린 33인의 형량이다. 최고형이 징역 3년 형으로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승훈, 한용운 6명이다. 1919년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 사건에 놀란 일제는 이제까지의 강압 정책에서 문화정책으로 급전한다. 회유하는 차원에서 형량을 관대하게 언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날 저녁 식사에 반주를 한잔 하시고 할아버지께서는 큰 손자인 나를 불러 앉혔다.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셨다. 무언가 말씀을 하시고 싶은데 ‘이 아이가 알아들을까?’ 하는 표정이시기도 했다. 

“일찍 죽은 참 애국자 네 작은할아버지는 이미 백골이 진토가 되어 흔적도 없는데, 그렇지 못했던 나는 이렇게 상을 받고 있으니 동생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다.”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같이 만세를 불렀던 친동생이 많이 생각나는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감정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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