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은호 님의 사연]
저에게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유학시절에 만나 꽤 가깝게 지내던 사이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 친구를 처음 안 시점부터 괴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꼭 본인이 불만이 있을 때 저를 찾아와 타인을 뒤에서 비방하거나 본인의 힘든 일을 쏟아내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학생활은 누구에게나 외롭고 힘들었기에, 그리고 제가 믿고 의지할 한국 친구가 몇 없었기에 저는 매번 참고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진심으로 위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겐 항상 정해진 답이 있는 듯했습니다. 원하는 위로를 해주지 않으면 저 마저도 뒤에서 욕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 역할은 그 친구의 부정적인 감정을 들어주는 역할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공감을 해주고 친구 입장에서 열심히 위로하고 응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고 친구의 감정이 풀려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대와는 달리 매번 똑같은 문제들을 여과 없이 뱉어내는 친구에게 너무 질려버렸고, 저의 감정도 많이 소모돼서 지쳤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완전히 거리를 두고 만남 자체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연락도 먼저 하지 않고요.. 안부를 물으면 대답 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면 단답형으로 들어주는 척만 하다가 연락을 끊어버립니다. 그런데도 한 번씩 주기적으로 꼭 연락을 하네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알아보니 저에게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의 다른 친구들과 남자 친구에게도 똑같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마음에 영 들지 않거나 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느낄 때 드는 분노나 힘든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해소하나요?
사연의 친구는 자신의 감정을 주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이러한 감정을 해소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이러한 친구의 행동은 은호 님에게 불쾌하고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아요. 은호 님이 보내주신 사연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함께 알아가 보도록 할게요.
친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위로해주는 은호 님의 모습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지네요. 친구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주자니 힘과 감정이 소모되고, 들어주지 않자니 관계가 깨지거나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되었겠어요. 내 역할이 친구의 부정적인 감정을 들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친구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힘든 감정을 함께 소화해주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친구를 도와주려 노력했던 것은 힘든 유학 시절을 함께 보내고 견뎌 왔던 친구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친구는 불만이 있을 때만 나를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은호 님이 지치고 화가 났던 것은, 힘과 정성을 들였음에도 친구와의 관계에서 기대했던 부분이 만족스럽게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인관계를 통해 얻고자 하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쉽게 오해가 생기고, 서로 불만을 가지기도 합니다. 은호 님에게 그 친구는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이며,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였던 것일까요?
모든 대인관계는 일방적인 소통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힘들 때 상대로부터 위안을 받았다면, 자신도 친구를 위해 노력을 해야만 관계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 자신을 대가 없이 일방적으로 돌보아주기를 바라는 무의식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화된 완벽한 어머니에게 기대하였던 희생적인 사랑을 사회적인 관계에서는 무턱대고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의존 욕구는 좌절되어 억압되거나,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에게 어린아이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라듯이 행동하면 화가 나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의 요구를 거절하면 죄책감이 유발되기도 합니다. 감정의 배출이 끝나면 사라져 버리는 친구는 은호 님에게 분노와 서운함을 느끼게 했고, 화가 나서 연락을 끊어보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편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네요.
우리의 마음속에 이렇게 분노와 죄책감 사이의 갈등이 생기면 불안이 발생하는데, 이런 감정을 처리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나름의 최선의 방식이 우리의 성격을 구성합니다. 친구는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주변에 전적인 공감과 위안을 요구함으로써 감정을 해소하고 자존감을 지키려는 것 같아요.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고, 만족이 되지 않으면 이내 다른 대상을 찾는 피상적인 대인관계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를 욕하는 것은 상대에게 어떤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이때 일반적으로 자신은 옳고 상대는 완전히 틀렸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받고 분노와 억울함을 표출하려 하죠. 하지만 들어주는 사람에게 이런 일방적인 이야기는 잘 공감이 되지 않고 진심으로 편을 들어주기도 쉽지 않습니다. 친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에게 좋고 나쁜 부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통합해서 느끼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또 누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지 확인함으로써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이간질하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데, 이때 주변의 사람들은 친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반응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습니다.
은호 님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이러한 친구의 방식과 맞물려 더 큰 괴로움을 유발했던 것 같아요. 친구에게는 이렇게 관계를 맺는 방식이 만족스럽지 않음에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어떤 중요한 이유나 상처가 있을 수 있어요. 또한 주변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 외롭고 공허할 때도 있을 겁니다. 지금은 나를 무조건 지지해줄 사람만을 찾아다니지만, 결국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면 상대를 위해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경험을 체득하고 성장할 충분한 시간이 친구에게 필요한 것 같아요. 사연의 내용만으로 제가 은호 님과 친구의 상황과 마음을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고민하고 사연까지 보내신 걸 보면 그 친구는 은호 님에게 생각보다 더 소중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친구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성장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든, 가벼운 관계만을 유지하거나 아예 관계를 정리하든 그것은 은호 님의 선택입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행복한 경험은 그 자체로 좋은 추억이 되지만, 힘든 경험 역시 생각하기에 따라 나를 성장하게 하고 대인관계를 더 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친구와의 경험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보다는 친구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 소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서로 상호작용 하는지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글을 통해 정신의학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전달해드리고, 여러분의 고민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린이 : NA (인스타@nabong_works)
도닥의 글은 격주 목요일에 뉴스레터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