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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자연 Jul 19. 2023

성급함의 함정 #1

쉬운 단절은 빠른 고립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어둠이 깔린 수요일 8시. 사람과 차들이 몸을 누일 곳으로 가느라 정신없이 분주한 시간. 큰 창 너머엔 남산이 빼꼼 보이는 건물 안에 있어요. 열 개의 층 아래 펼쳐진 불빛 가득한 팔 차선 도로를 가만 본 적 있어요. 왼쪽에는 빨간빛, 오른쪽에는 하얀빛이 끝없이 이어지고 앞 차량의 속도에 맞추어 틈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조금씩 그러나 빠른 반응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그곳은 서울에서 경기도로 향하는 빨간색의 광역버스 정류장이 즐비한 곳이라 도로의 상황은 언제나 막막하고도 촘촘하지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은 개미처럼 긴 줄을 만들어 버스 앞 숫자를 응시하고 있어요.



빨강이면 '얼음'하고 일제히 멈추고 초록으로 바뀌면 그제야 ‘땡'하고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도로의 풍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봅니다. 당장 저 아래의 혼잡함 사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어요.



그렇게 한참 도로를 주시하다 한 차량이 눈에 들어왔어요. 마치 벌에 쫓기는 곰처럼 추월을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연 저 차가 다른 차보다 얼마나 앞서갈 수 있을까' 하는 순간의 호기심이 발동했어요. 그래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첫 번째 관문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은 많은 차량입니다. 두 번째는 관문은 신호였어요. 초록색으로 바뀐 후로도 추월한 차량 수 만큼 나아가지 못해요. 앞서나가려는 수고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오히려 가만히 한 길을 따라간 차량들이 금세 그 차량 옆을 지나가고 있어요.



분명 그 차량은 여러 차를 추월했어요. 보다 많은 차량을 제쳤으니 더 빨리, 더 멀리 가고 있다고 착각했을지 모릅니다. 추월한 만큼 그 도로 위에서 앞서 나가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 차량의 운전자에게는 빠르게 가야 할 그만의 속사정이 있을 테니 이 차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이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 사람들, 세상을 향해 옮겨갑니다.



속력을 올리고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통과하며 급히 가면 우리는 그만큼의 격차를 만들며 앞서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건 어쩌면 누군가 우리에게 주입시킨 답이며 우리는 명쾌한 그 답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여 단단히 굳어진 오류가 아닐까요. 그 도로에서 우리를 더 빠른 속도로 내달리게 하기 위해서요. 무한 경쟁은 높은 성과를 올리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로 여겨지니까요.



잠시 멈추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급하게 앞서나가려 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어요. 과연 그 혼잡하고 빽빽한 도로 위에서 마지막에 웃을 승자는 누구일까요. 적어도 조급한 마음으로 많은 차량을 제친 그 차량은 아닐 겁니다.  



흔히 성급한 사람은 일을 그르친다고 합니다. 성급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어떠한 두려움이 웅크린 채로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에요. 알아차릴 수 없는 기저의 두려움에 싹이 트고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의 울창한 강박이 되기 십상입니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거나,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금세 불안에 휩싸이고 말아요. 그런 상태에서는 너무나 쉽게 타자를 판단하며 심지어는 배척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화살은 타인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을 향하기 쉬워요.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요. 내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은 참 별로야.'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고는 눈엣가시 같았던 그 사람이 내게 약간이라도 호의를 베푸는 날이 오면 속으로 괜히 머쓱해 했던 일. 혹은 주변의 누군가를 보며 '나는 왜 저렇게 하지 못할까?'하고 또 한 번 급히 스스로의 한계를 단정 지었던 일. 그 사람과 나는 분명히 다른 길을 다른 속도로 가고 있을 뿐인데 말이죠.



또 손절이라는 단어를 자주 마주합니다. 손절은 원래 주가가 하락할 것을 예상해 손해를 입더라도 매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식 용어이나 지금은 '절교'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말 그대로 서로의 교제를 끊는 것이죠. 물론 지속적이고 일방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라면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시간과 마음을 들이며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 그 자체에 반감을 가지는 듯 해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는 일은 별 볼일 없는 일 혹은 손해라고 판단해 빠르게 손절합니다. 그 손절은 불가피했다며 위로해요. 그 사람은 나와 맞지 않았고,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요. 가벼운 손절은 우리를 쉽게 단절시켜요. 쉬운 단절은 빠른 고립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가볍게 손절한 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없어요. 그때 우리는 누구에게 손 내밀 수 있을까요. 어딘가 어색한 몸짓으로 쭈뼛거리며 피치 못했던 그때의 사정을 상기된 낯으로 전하는 때가 오지 않을 거라 확신하나요.



비록 당장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러한 일이 결코 없을거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내가 쉽게 손절해버린 그 사람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나쁘기만 한 사람이고, 그 사건은 나와는 연결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개라도 존재할까요.



언젠가 만난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기억합니다.

아무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있다가 정작 당신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자비를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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