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려는 남자의 이야기
축제는 끝났다.
불이 꺼진 야구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어둠 속에 몸을 맡긴 남자가 있다.
영화는 야구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그 남자, 빌리 빈을 따라간다.
실존하는 빌리 빈은 야구를 통계학으로 재해석한 빌 제임스의 이론을
메이저리그에 전폭적으로 도입해 오클랜스 애슬레틱스 20연승의 신화를 이뤄낸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는 제리 맥과이어나 키팅 선생같은 휴머니스트가 아니라,
냉철하고 합리적인 경영인이다.
스포츠 영화가 중심 가치로 삼는 쾌감을 위해서 적당한 주인공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빌리 빈이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팀의 부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빌리 빈의 진정한 목표는
꿈과 현실, 가쉽과 진실, 성공과 실패가
끊임없이 뒤섞이는 세상의 혼란스런 안개를 걷어내는 것에 있다.
수많은 전기영화들처럼
빌리 빈이 극복해야 하는 외면적 장애물은 그의 내면적 아픔과 궤를 같이 한다.
그는 대학 진학과 프로팀 진출을 양자택일하는 순간에
돈을 쫓아서 야구선수가 되었지만,
한명의 선수로서 빌리 빈의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당연하다.
사람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자욱한 삶의 미혹이 자신을, 선수들을, 팀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경기날에도 야구장의 관중석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야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깊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징크스는 애슬레틱스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빌리 빈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때 빌리가 머니볼 이론에 따라 처음으로 영입했던 스콧 해티버그의 호쾌한 장타음이 스타디움을 울리고,
그제서야 빌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홈런 home-Run.
기나긴 안개의 시간을 지나,
빌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정할 수 없이 야구를 사랑했던 그 시간으로.
그래서 빌리는 고백할 수 있었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라고.
그 일대 혁명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우승에 실패한다.
'출루율'이라는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머니볼 이론과 달리,
인생은 결코 그 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건 빌리 빈이 보스턴 레드삭스가 제안한 거액의 연봉을 거절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정답이 없기에 삶은 괴롭지만,
정답이 없기에 삶은 자유롭다.
삶이란 그 무정답의 자유를 즐겨나갈 때 아름다운 것이다.
빌리 빈의 딸이 부르는 the show의 가사처럼.
Just enjoy the show.
똑같이 실존인물을 다루었던
<이미테이션 게임>이나 <다키스트 아워>의 오프닝과 달리,
<머니볼>의 빌리 빈은 타인의 눈으로 '발견'되는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 홀로, 홀연하게 '등장'한다.
그 결과 우리 관객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이 남자의 내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도 빌리 빈의 고독한 혁명을 묵묵히 뒤따른다.
결국 <머니볼>의 영화문법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은 타인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희망의 증거이다.
영화는 빌리 빈이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릴 때 끝나버린다.
누군가가 울음을 터트릴 때 자리를 피해주는 것,
그것이 베넷 밀러의 카메라가 지켜나가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이토록 침착한 시선을 보여주는 영화 <머니볼>이 잊을 수 없도록 감동적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우리 잘못이 아닌 일로
오래도록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또 아파왔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머니볼>은 말한다.
포기하지 말고 싸워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