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잃은 남자
공산주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악몽은
꿈의 제국 할리우드를 집어삼켰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마녀사냥을 시작했고,
그 틈을 타 존 웨인과 헤다 호퍼를 위시한 '영화동맹'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영화산업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먼 바다 건너의 대한민국에서는 각기 다른 이념의 기치 아래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케임브릿지 5인조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동구권 스파이들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분명히' 암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이후에도 북한은
1.21사태, 아웅산 폭탄테러, KAL기 폭파사건 등
당장 전면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무력 도발을 자행했다.
허나, 그 악업은 결코 공산권에만 있지 않다.
CIA가 제3세계에서 수많은 군사 쿠데타를 조종했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며,
수많은 사상자를 낸 2차 중동전쟁 또한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서구권의 탐욕으로 벌어졌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다.
누가 절대반지를 갖느냐에 대한 끝도 없는 쟁탈전.
문제는 톨킨의 절대반지는 운명의 산에서 파괴될 수 있었지만,
현실의 절대반지는 결코, 무슨 수로도 파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산권의 팽창에 따른 패권 상실을 두려워한 미 정부는
헐리우드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을 사실상 주도했으며,
헐리우드의 스타들은 그 능숙한 스토리텔링과 대중장악 솜씨로 미국인들의 뇌리에
빨갱이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제대로 아로새겼다.
말하자면 매카시즘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던 국제 정치학적 방어 작용이었으되,
그것이 들불처럼 번져나간 과정은 도를 넘어선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트럼보>는 헐리우드 블랙리스트의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1905~1976)를 조명한다.
그의 인생 중에서도, 매카시즘의 광풍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다키스트 아워'를.
트럼보는 반공주의의 확산과 반미조사위원회의 출석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원이자 노조 지지자인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브레이킹 베드>로 에미상을 석권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너무나 탁월하게 연기해내는
트럼보의 모습은 공산주의 광신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알콜에 절어있고, 골초에, 얄미울 정도로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빈곤을 애처롭게 여겼고, 부당한 체제 앞에서 침묵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것이 아무리 싸구려 동정이나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할지언정,
그는 자신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충실했다.
운이 나쁘게도 그는 의회 모독죄로 실형을 언도받고,
간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 없는 알몸뚱이를 까보이는 치욕을 시작으로
인생의 암흑기에 접어든다.
신성한 의회를 모독한 빨갱이 작가를 써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으며,
한때 친구라고 믿었던 이는 그를 가차없이 고발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는 자긍심보다 훨씬 거대한 대가를 치른다.
이때 트럼보를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예술가의 자부심이 아니라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들이다.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던 시나리오 작가가
B급 영화사를 전전하며, 그것도 유령작가로서, 공장처럼 시나리오를 찍어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신념을 꺾은 에디가 자신의 화실에 값비싼 그림을 늘려가는 동안,
트럼보는 그 치욕적인 밥벌이로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동료들의 삶을 유지시킨다.
결국 트럼보에게 글쓰기란 가장 직설적인 의미에서의 생명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재능은 가장 속물적인 B급 영화판에서 절정으로 개화한다.
트럼보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렀고,
그로 인해 닥친 인생의 암흑기를 작가로서의 성실함으로 이겨냈다.
비록 스텝롤에 새겨진 트럼보라는 자신의 이름과,
아꼈던 친구들,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그는 한순간도 세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유령작가의 이름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그것도 2회나 수상할 이야기들을 써낼 수 있었다.
최근 등장하는 많은 컨텐츠에서 그려지는 '작가'라는 직업의 모습과 달리,
트럼보는 사람들의 존경을 요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가는 한바탕 꿈 같은 광대짓을 획책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보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에 가까웠다.
모두가 외치고 싶어하는 말을 삼키고,
모두가 외치기 꺼려하는 말을 던질 수 있는 사람.
그것이 곧 생존生存이자 실존實存인 사람.
<트럼보>는 소신을 위해 대가를 감내하는 주인공은
우리를 감읍시키고 만다는 단순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영화 <트럼보>는 트럼보와 동세대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러나 트럼보보다 일찍 전성기를 맞았던 작가 허먼 맨키비츠를 다룬 <맹크>와 비교하며 보아도 좋다.
허먼 맨키비츠는 <시민 케인>을 통해 위대한 미국의 '몰락'을 예견했고,
달튼 트럼보는 <스파르타쿠스>를 통해 위대한 미국의 '부활'을 꿈꿨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끝끝내 관철했고,
그 대가로 한때 이름을 잃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름조차 기꺼이 버릴 수 있었던 그 용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