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영화감독이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광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다음의 단계를 거쳤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많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극장을 나설 때 감독의 이름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나는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내가 감독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트뤼포 뿐만 아니라 많은 위대한 창작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를 마르고 닳도록 다시 보았다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우리의 사고는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기서 무언가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저 놈을 아주 혼내줬으면 좋겠는데',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할까?', '주인공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등,
강렬한 호기심과 정서적 족쇄들이 우리의 사고가 샛길로 빠지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영화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그 내면과 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 과정은 트뤼포의 말대로 감독과 작가의 선택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창작이란 결국 크고 작은 선택의 연쇄임을 생각한다면,
위대한 창작자의 선택을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비밀을 엿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미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하나의 저항정신이기도 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컨텐츠들은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 소설과 시를 그저 소비의 대상으로써 보게 만듭니다.
더 참담하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영화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했습니다.
그건 관객이나 시청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혐의를 창작자에게 역전시켜 말하자면,
"다시 볼 만큼 잘 만든 영화들이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작자들도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오직 일회성의 재미만을 원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관객이 재미를 쫓고, 창작자는 수익을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건 영화나 드라마의 숙명입니다.
이들은 제작에 있어 '많은 돈', 그것도 '남의 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느냐는 질문이 결코 잊혀져선 안됩니다.
지금 영화관이나 OTT, 텔레비전 속에는
사회에 만연한 증오에 편승해 그것을 더욱 부추기거나,
왜곡과 무지를 이용하거나, 판타지라는 마약에의 도취만을 권하는 컨텐츠들이 넘쳐납니다.
물론 이들 중엔 큰 재미를 안겨주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 최면이 끝났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더 큰 증오와 무지, 결핍일 뿐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끝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그 순간부터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일회성의 소비로서 향유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무지성'이라는 단어가 농담처럼,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바보를 만드는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양심 없는 장사꾼, 혹은 사기꾼과 악당들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지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바보가 되라고 부추깁니다.
결국 우리의 지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 점점 사라져가는 오늘날의 풍경은
사유를 포기한 관객과, 설득을 포기한 창작자가 야합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세상이 망가지고 있다면 그 혐의는 결코 어느 한 집단에만 있지 않습니다.
패스트 무비와 쇼츠가 유행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고,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것은 우리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늘날의 이야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은 그것을 보는 우리의 안목이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쌍방과실의 악순환 속에서,
좋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소비의 대상으로부터 이탈시켜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그건 관객으로서의 노력일 뿐 아니라
그 배움을 통해 더 나은 무언가를 잉태하려는 창작자로서의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영화 속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설마 그 감독/작가가 그 정도까지 생각했을라고요'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저는 속이 상하곤 합니다.
창작자마저 창작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작품의 창작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던 간에 상관없이,
그리고 내 작품을 보아줄 사람들이 어떻게 보던 간에 상관없이,
치열하게 보고 치열하게 써야만,
더 나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향유되는 선순환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숨이 나오는 컨텐츠가 많아지고,
기계가 창작자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거란 전망이 확고해진 시대입니다.
거기에 불안을 느끼던, 기대를 품던 간에
좋은 작품을 끝없이 다시 보고 탐구하며,
거기 담긴 세상과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태도가 멈춰선 안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기계가 창작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숙명일지라도,
관객의 자리는 결국 인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탁월한 작품을 보고 감동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작품의 위대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그 작품들이 치열하게 탐구한 인간의 모습이
우리에게 한가지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같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결국 영화는 하나의 기록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그것을 포기한다면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인간에 대한 시선의 기록은 말소되고 말 것입니다.
시선을 거둘 때, 우린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시대를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의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말입니다.
인간에 대해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또 그것을 들으려 한다는 것.
그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사랑이자
우리가 결코 놓아버려선 안 되는 희망일 것입니다.
원래 데이빗 핀처의 <세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참이었는데, 서론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넋두리에 가까운 글이 되었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도 이미 본 것을 다시 본다는 그 희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