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쥔 작은 별
한때,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한 효과적인 이론을 찾고자
걸신들린 듯이 책의 무덤을 뒤지던 시절이 있었다.
서사 이론의 반석을 닦은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이야기는 같은 원형을 공유한다는 조셉 캠벨과 블라디미르 프롭,
인간의 무의식은 집단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칼 구스타프 융,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는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이야기에서 구조의 중요성을 주장한 시드 필드와 주제의 중요성을 주장한 라요스 에그리.
하지만 그 어떤 이론도 손끝에서 탁월한 이야기를 샘솟게 만드는 성배는 아니었다.
삼십대가 되고서야 알았다.
이야기란 결국 어떤 인간의 삶의 단면이며, 삶이란 어떤 이론에도 구겨넣을 수가 없다는 것을.
지금도 자기수양이자 심심풀이의 일종으로 새로운 작법서를 뒤적이곤 하지만,
더이상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법서를 뒤적이진 않는다.
나에게 좋은 이야기란 결국 내가 살아온 삶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를 구상할 때마다 나는 두가지의 원칙을 주기도문처럼 되뇌고 있다.
하나.
좋은 이야기란, 결국 인물 내면으로의 여정이다.
나는 최초 공개됐던 일반판 <안나>를 별 기대없이 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공개됐던 많은 기대작들이 큰 실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톱스타인 배수지를 기용하고도 지극히 어두운 서사를,
그것도 요란떨지 않고 펼쳐내는 <안나>는
시선을 사로잡는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꽤나 인상적인 감상을 마치고서 한참 뒤, 나는 <안나>의 감독판이 공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매체에서)감독판이나 확장판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감독판이란 결국 감독의 편집본인데,
여지껏 '감독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작품들이 일반판보다 나은 경우를 거의 못 봤기 때문이다.
그 영화나 드라마를 직접 찍은 감독은 테이크 하나하나에 담긴 노고를 알고 또 느꼈기에
어떤 쇼트나 씬의 필요성을 객관적으로 판가름하기 어렵다.
하지만 편집자는 그런 노고 따윈 모르며,
혹시 그 노고를 알아서도 안 되기에 가급적 촬영장에도 방문하지 않는다.
하여 (감독의 주장대로 편집한)감독판과 (편집자 혹은 제작사의 주장대로 편집한)일반판을 비교하면
보통 전자가 방만하거나 지루하다.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리들리 스콧처럼, 감독판이 일반판보다 훨씬 나은 드문 사례도 있다)
하지만 <안나>가 다시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드라마라고 느꼈던 터라,
이왕 다시 보아야 한다면 감독판을 보기로 결정하고 플레이를 눌렀다.
마지막화가 끝났을 때,
나는 감독판이 일반판보다 더 나은 사례로 <안나 : 감독판>을 추가하기로 했다.
일반판 <안나>는 잘 정돈된, 혹은 약간 칼같이 다듬은 정원의 느낌이었다면,
감독판 <안나>는 풀과 나무가 알아서 자라도록 놓아둔 듯한 정원이다.
노닐기 편안한 것은 전자겠지만 보다 마력적인 생명력을 가진 것은 후자다.
조경수의 잔가지와 잔뿌리는 서사로 비교하자면 지엽말단,
그것이 없다고 해도 서사의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요소를 말할 것이다.
<안나 : 감독판>에는 이유미-안나의 전사가 더 추가되었고,
통편집되었던 이현주(정은채), 최지훈(김준한), 한지원(박예영)의 전사가 추가되었다.
무엇보다 이유미-안나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존재한다.
말 그대로 지엽말단이지만, 이 잔가지와 잔뿌리들은 이 드라마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말하자면 <안나>에서의 유미는 동정하기 어려운 사기꾼이지만,
<안나 : 감독판>에서의 유미는 길을 잘못 들어버린 측은한 사람이다.
감독판이 '그래봤자 사기꾼'인 유미를 지나치게 변호하고 있다고 비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법관의 역할을 픽션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픽션이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창안된 것이 아니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창안된 도구다.
이 이야기가 사기꾼에 대한 이해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오늘날 컨텐츠를 소비하는 수용자층의 지성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나 : 감독판>은 사기꾼을 변호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짓을 자아내다가 끝내 자신의 팔다리마저 매여
마리오네트로 전락해버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가난한 양복점의 외동딸로 태어난 유미는
어린 시절 자신을 보살펴줬던 미국인 여성 캐서린으로부터 '포커페이스'를 배운다.
그녀가 가르쳐준 포커페이스란 '네가 뭘 들고 있는지 상대가 몰라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학생이 된 유미는 아버지를 졸라 무리해서 발레 콩쿨에 출전한다.
콩쿨에 나가지 않는다는 건 '가난한 양복점 딸'이라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인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소문을 즐기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가난을 숨기는 것이 유미 방식의 포커페이스였다.
<라 에스메랄다> 선율을 따라 공연을 펼친 유미는 끝내 콩쿨에서 금상을 따낸다.
그때 깨질 뻔한 자존심을 지켰던 탓일까, 유미는 인기 많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잘생긴 남자 선생과 비밀리에 연애 중이었지만, 큰 일탈은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교제사실이 발각되어 문제가 되자,
선생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유미가 먼저 꼬리를 쳤다며 모든 오명을 떠넘긴다.
이때의 경험은 유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포커페이스를 버리고 마음을 그대로 내보였는데,
그 진심은 무참히 짓밟혀 깨지고 말았다.
이후 그녀는 두 번 다시 이때처럼 환하게 웃지 않고,
누구에게도 진심을 꺼내놓지 않고,
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그 순간 갈갈이 찢어진 것이다.
불행이란 마치 하이에나와 같아서,
고통을 받는 이에게 더더욱 몰려들어 그 상처를 키우고 헤집어 놓는다.
이후 유미는 도망치듯 전학을 가고,
수능을 망쳐 원하던 대학을 놓치고,
부모님의 실망이 두려워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결국엔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게 된다.
유미는 깨달은 것이다.
불행한 진실 따윈, 행복한 거짓으로 덮으면 된다... 고.
끝내 그 거짓이 발각된 순간 두 사람이 그녀의 곁을 떠났다.
거짓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유미의 남자친구와,
거짓임을 알면서도 늘 속아주었던 유미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미는 죄책감을 씻으려는 듯 열심히 살았다.
한 뼘짜리 고시원 방에 머물며 햄버거 패티를 굽고, 주차 안내를 하고, 숯불을 피우며.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던 그녀는 한없이 높은 언덕을 걸어올라 '마레 컬렉션'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유미는 현주를 만난다.
자신이 결코 누릴 수 없는 화려한 삶을 누리는 현주를.
몸을 거덜낼 듯한 노동과 영혼을 할퀴는 모멸을 견디던 유미는 문득 깨닫는다.
난 평생을 이렇게 살 자신이 없다고.
그래서 그날, 유미는 현주의 삶을 훔치기로 한다.
어린 시절 고사리손으로 연주하던 <반짝반짝 작은 별>을 잊고,
환호와 박수 속에서 울리던 <라 에스메랄다> 선율 속에서 춤추기로.
하지만 거짓을 반복할수록 유미의 삶은 통제 불가능한 구렁텅이로 몰려갈 뿐이다.
진실은 단순하지만 거짓은 복잡하고,
끝내 그 복잡한 거짓은 빠져나올 수 없는 무저갱의 미로가 되어 스스로를 옭아매는 법이니까.
이제 와서 돌아갈 순 없기에 자신이 만든 거짓에 떠밀려가던 유미는 종국에 와서 깨닫는다.
돌아갈 방법은 있다고.
바로 자신 스스로 그 거짓의 실을 가위로 끊는 것.
하지만 각오해야만 한다.
더이상 지탱해줄 것이 없어 바닥에 널브러지는 참혹함을.
<안나 : 감독판>의 서사는 결국 유미라는 여자의 내면에 대한 여행과 같다.
유미와 주요 등장인물들이 결국 유미라는 한 존재의 각기 다른 측면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유미를 믿어주었고 부조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선배 한지원은
유미 스스로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만 되지 못한 모습이며,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운 이현주는 유미가 꿈꾸고 바랬던 자신의 모습,
무자비하고 사악한 얼굴을 선량의 탈 아래 감추고 있는 최지훈은
유미가 이 거짓된 길을 계속 걸어가면 마주하게 될 자신의 모습,
아무런 힘도 없지만 꿋꿋하게 버티며 꿈을 쫓는 비서 조유미는
유미가 과거에 잃어버린 자신 스스로의 모습인 것이다.
거짓에 떠밀리는 수동적 주인공 유미에게 변화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결국 그녀 스스로의 다양한 모습이 구현된, 이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다.
그래서 감독판에서 추가된 조연들의 전사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유미가 그랬던 것처럼, 이 캐릭터들 역시 과거의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런 사람'으로 규정해버린 그날의 그 선택들에.
우리가 유미를 보며 그녀 내면으로의 여정을 떠나고,
유미가 조연들을 통해 자신 내면으로의 여정을 떠나듯이,
조연들 또한 내내 자신 내면으로의 여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나 : 감독판>은 좋은 이야기다.
다른 어딘가도 아닌, 어떤 누군가의 내면에 대한 여정이기에.
이주영 감독은 그 내면으로의 여정을 꼼꼼한 각본으로 완성해냈고,
어느 한 장면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인습적인 구도로 연출하지 않았다.
그 탁월한 각본과 집요한 연출에 힘입어,
배수지 역시 지금까지의 경력 중 가장 탁월한 연기를 선보이며 이유미를
'수지'가 아닌 살아있는 '이유미'로 보이게 만든다.
극 중 그녀가 보여주는 화사하고, 슬프고, 지치고, 사악하고, 후회하는 그 다양한 얼굴은
어쩌면 업계가 한 진지한 배우를 스타성만으로도 소모하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결과론적이지만 <안나>는 누구보다도 배수지가 맡아야만 하는 역할이었다.
그녀만큼이나 등장만으로 보는 이들의 사랑을 얻어내는 배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수지의 그 매혹적인 얼굴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 하다.
당신은 이 거짓의 매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냐고.
나는 앞서, 나 스스로가 가진 좋은 이야기에 대한 원칙이 두가지 있다고 썼고, 하나는 이미 언급했다.
나머지 하나는 그것이 어떤 형태든, 보는 이를 감읍시킬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
나에게
<나의 아저씨>는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존재를 보듬으려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스토브리그>는 우리의 잃어버린 꿈을 사랑하는 이야기이고,
<하얀 거탑>은 스승과 제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세상 전부를 버리더라도 지키고 싶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브레이킹 베드>는 인간성의 그릇된 욕망조차 사랑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 담긴 사랑은 뭘까.
<안나 : 감독판>은 매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된 <반짝반짝 작은 별>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그 가녀린 멜로디는 역시 곳곳에서 변주되어 울려퍼지는 <라 에스메랄다>의
고혹적이고 절도있는 선율에 비하면 너무 나약하게 들리지만,
한때의 유미가 사랑했던 멜로디다.
바로 가난하지만 따스했던 집안의 사랑받는 외동딸이었던, 진정한 자신에게서 들려오는 멜로디.
결국 나에게 <안나 : 감독판>은 허울과 껍데기가 아닌, 진정한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보인다.
초라하거나 작고, 혹은 흉하거나 보잘 것 없을지라도,
내 옆의 어떤 화려함이나 커다란 성공과 비교될지라도,
우리 스스로 결코 내버려선 안되는 진정한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는 그 사랑.
유미는 그 사랑을 깨달았기에 안나라는 화려한 성을 부수고 초라한 유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엔딩을 장식하는 음악은 다시 <라 에스메랄다>.
<안나 : 감독판>은 그 유혹 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부디 잊지 말라고.
당신이 한때 쥐고 있던,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