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망친 서사의 이야기
합정역 한복판에서 한 남자가 살해당하는 괴사건이 벌어진다.
시민들은 들썩이고, 경찰이 움직이지만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 살인사건의 범인은 초자연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혼란 속에서 신흥종교단체인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가 주목받는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 괴사건의 진실에 대해 설파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사건은 오래 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살해당한 이들은 하나같이 'X월 X일 X시 X분에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초자연적 존재로부터 전달받았고,
고지를 받은 이들 모두가 과거에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즉 사람을 죽인 괴생명체 3구는 지옥의 사자들이며,
이 참살 역시도 죄인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믿는 이들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새진리회의 교리에 현혹된 과격파들은 '화살촉'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그들 스스로 과녁을 지정하고 있으며, 도처에서 징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난무한다.
게다가 어린 자식들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박정자는
'고지'받은 사실을 밝히고 그 '시연'의 중계에 동의한다.
정확한 시간에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고, 끝내 박정자는 카메라 앞에서 참살당한다.
그 참혹한 풍경을 본 구경꾼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그것이 신의 징벌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정진수는 고대의 제사장과 같다.
사람들이 원인 모를 괴현상 앞에서 공포에 떠는 동안,
그는 그 괴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즉 서사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신화가 고대인들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창조한 서사라면,
정진수는 21세기의 신화를 새롭게 고안해낸 셈이다.
문제는 그 신화가 정진수의 뒤틀린 자기연민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신화를 써낸 작가 정진수는 그것이 오용된 서사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 역시도 이미 오래전에 고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그를 좌절과 분노의 구렁텅이에 빠트렸다.
미지라는 공포, 무의미라는 공허.
죽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그는 순순히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작정으로 그럴 듯한 서사를 창조해냈고,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를 창설했다.
문제는 그의 서사가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 전부를 정의의 편집증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고지를 받은 이들에겐 가차없는 죄인의 낙인이 떨어지고,
그 가족들마저 연좌제적 핍박 속에서 고통받는다.
고지를 받은 이들이 가족들의 연좌라도 면하기 위해 죄를 고백하며 읍소하는 모습은
인민재판의 자아비판을 연상시킨다.
살인과 난도질은 정의롭기를 강요하는 잔혹한 쇼로 전시되고,
새진리회는 폭압적인 독재적 종교로 자리잡는다.
공포스런 정의가 짙게 깔린 세상.
<지옥>은 정진수의 실토를 듣는 형사 진경훈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물었었다.
설사 기만과 공포로 이뤄졌다 한들,
당신은 이 정의로운 세상을 부술 수 있느냐고.
더 정확히는 불의와 악인이 마땅히 말살당하는, 증오가 인정되는 세상을.
진경훈은 차마 부수지 못한다.
아내의 살인범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살인범이 되어버린,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정진수의 사후,
세상은 지옥을 두려워하다 지옥이 되고 만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변화의 단초가 된 초자연적 존재들은
우리가 그것을 규명하고 이해할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순전히 정진수가 고안해낸 서사의 효과다.
얼핏 이치에 맞고 또 견고해보이던 정진수의 서사는
어떤 갓난아이에게 내려진 고지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죄 있는 자만이 지옥에 떨어진다는 새진리회-정진수의 교리(서사)로 볼 때,
갓 태어난 아기가 고지를 받았다는 것은 명백한 서사의 오류가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새진리회 상층부는 발칵 뒤집히고,
아기가 지옥의 사자들에게 살해당할 '시연'의 현장을 감추기 위해 혈안이 된다.
젊은 부부이자 부모인 영재와 소현은
새진리회의 마수에서 벗어나 아기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최후의 순간 다다른 곳은 복도식 아파트의 중앙정원이다.
주민들은 소란통에 복도로 고개를 내민 채 소현과 아기를 쳐다보고,
이는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판옵티콘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극중의 지옥이 모두가 모두를 정의롭도록 감시하는 세상이라면,
클라이맥스의 공간 역시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감옥의 형태인 것이다.
이 지옥의 구조를 시각화한 듯한 공간에서,
나약한 엄마인 소현은 외친다.
이 아기는 고지를 받았노라고.
순결한 존재가 곧 지옥에 떨어진다는 그 충격적인 소식에
사람들이 굳게 믿어왔던 서사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이 살벌한 판옵티콘의 서사에 균열을 일으키는 건
더 치밀한 서사나 거대한 폭력이 아니라
지옥의 정중앙에 놓인 한 가녀린 엄마의 진실한 외침이다.
기어이 찾아온 지옥의 사자들 앞에서 영재와 소현은 아기를 감싸안는다.
사자들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부모, 그 품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다.
오용된 서사가 만든 지옥.
그 지옥을 부수는 슬픈 울음소리.
삼한시대 존재했던 제사터이자
죄인이 도망쳐 들어간다 해도 감히 쫓아 들어갈 수 없었던 성역인
'소도'의 이름을 딴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민혜진 변호사는
그 작은 아기를 안고 도망치다가 택시에 오른다.
민혜진의 정체를 눈치챈 듯한 택시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지요."
악이 횡행하고 질서가 무너진 작금의 '인간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질서를 원하고 있다.
질서란 달리 말해 서사다.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
<지옥>은 그럴듯한 서사, 그 중에서도 증오와 공포의 서사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지옥>은 이 시대의 스토리텔러들과 그 수용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기꾼의 말이란 과학이나 문명의 대답보다 항상 그럴 듯 하며,
진경훈이 딸에 대한 사랑으로 정진수의 진실을 차마 폭로하지 못했듯,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세상이 지옥이라면,
그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영웅이나 신화적 서사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견고한 서사를 의심할 줄 아는 용기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