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이 Dec 30. 2021

스파이 게임 Spy Game, 2001

첩보영화로 위장한 버디무비



-<스파이 게임>에 대한, 시나리오 작법적 견해입니다.


 중국 수차오 감옥에 한 무리의 스파이들이 잠입합니다. 예방접종을 시행하러 온 의사로 위장한 그들의 목적은 죄수 하나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완수하고 탈출하기 직전, 운 나쁘게도 정체가 발각되고 임무를 지휘하던 CIA 첩보원 톰 비숍(브래드 피트)은 간첩 혐의로 억류당합니다. 한편 미국에선 은퇴를 앞둔 베테랑 CIA 요원 네이단 뮈어(로버트 레드포드)가 그 소식을 듣게 되고, 그는 CIA가 (늘 그렇듯) 요원인 비숍과 CIA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하리라고 예측합니다. 그렇게 되면 비숍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발단에서 일단 우리는 한 가지가 궁금해집니다. 뮈어에게 비숍은 어떤 존재일까, 라는 의문이지요.

 토니 스콧이 연출하고 데이비드 아라타, 마이클 프로스트 베크너가 쓴 <스파이 게임>은 보기 드물 만큼 각본의 완성도가 탁월합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첩보 액션 영화처럼 멋들어진 첩보원과 그에게 주어진 불가능한 임무라는 단순한 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은퇴를 앞둔 채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는 노년의 첩보원이고, 그에게는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스파이 장비나 일당백의 전투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의 적은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요원의 생명을 포기하려는 CIA 조직 그 자체입니다. 이 영화가 <제이슨 본>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서사가 비선형적이어서 복잡하게 느껴지는 편인 데다, 장르적 과장을 최소화하고 현실적인 장치들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 걸출한 리얼리즘 첩보물은 드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와중에 <스파이 게임>이 탁월한 것은 그저 '첩보' 영화가 아니라 '첩보 액션' 영화라는 점입니다. 필연적으로 '과장'을 요구하는 오락물 안에서 현실적인 장치를 도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스파이 게임>이 일반적인 블록버스터에 비해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나, 이 영화는 명료한 서사로 이야기를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설계는 복잡할지언정, 그 구현의 방식은 단순합니다. 결국 <스파이 게임>은 복잡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과 더불어, 하나의 장르를 극히 리얼리즘적으로 표현할 때, 새로운 독창성이 우러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레퍼런스입니다.

 출근한 뮈어는 CIA 수뇌부로부터 호출을 받고, 비숍에 대한 정보를 넘기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수뇌부의 꿍꿍이를 모르는 상태이니 정보를 숨기려던 뮈어는, 역으로 그들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비숍과의 인연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합니다. 뮈어와 비숍의 인연은 75년 베트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숍은 미군 저격수였고, 뮈어는 군사 고문 역할로 파견된 요원이었습니다. 뮈어는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해내는 비숍의 배짱에 반했고, 결국 그를 첩보원의 세계로 끌어들였습니다. 다른 영화라면 이들의 인연의 두께와 그 감정선을 세팅하기 위해 최대한 발단을 늦췄을 테지만, <스파이 게임>은 일단 비숍을 위기에 빠트린 뒤에 비숍에 대해 진술하는 뮈어를 통해 그들의 인연을 후행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플래시백 설계가 대단히 영리한 것은, 단순히 비숍을 그리워하는 뮈어의 정서적인 동기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뮈어는 CIA 수뇌부로부터 비숍에 대한 정보를 말할 것을 강요받고 있고, 그 서사적 당위성에 의해 비숍과 뮈어의 인연이 설명되는 방식입니다. 만약 정서적인 동기로 플래시백을 끌어들였다면 이야기의 속도감이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뮈어가 오늘 은퇴할 예정이라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현재 CIA에는 뮈어를 능가하는 베테랑 요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얼핏 유쾌하고, 사교적이며, 때론 편의를 위해 원칙을 어기는 인물로 보이지만 모든 것은 스파이로서 철저히 계산되고 훈련된 행동입니다. 그만큼 뮈어는 비숍의 억류 소식을 들은 순간 많은 것을 예측했습니다. 필시 CIA는 비숍의 구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자신에게 비숍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뮈어가 회의실에서 비숍에 대해 진술하는 동안, 다른 요원들은 뮈어의 방을 뒤져 비숍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뮈어는 이미 비숍에 대한 파일들을 숨겨두었고, 뮈어는 수뇌부에겐 별 도움도 안 될 베트남에서의 과거를 진술해주고 대신 중요한 정보 하나를 얻어냅니다. 그들이 비숍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이유는 중국이 서둘러 비숍을 처형하게 만들 속셈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중국과 무역협정을 앞둔 지금, CIA 소속인 비숍이 중국 감옥에 침투했다는 사실은 외교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될 테니까요.

 뮈어는 발등에 불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비숍의 처형까지 남은 시간이 고작 24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인공에겐 타임 리미트와 더불어 목적이 주어집니다. 뮈어는 은퇴 당일, 인생 최후의 작전에 나서야 하는 셈입니다. 그것도 CIA라는 조직의 지원과 도움도 없이, 되려 그들까지 속여야만 합니다. 그야말로 적수공권, 혈혈단신이지요.

 뮈어는 CNN에 비숍의 억류 사실을 유출시킴으로써 CIA로 하여금 비숍의 구출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체포된 자국 요원을 CIA가 외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내의 여론이 CIA를 맹렬히 비난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비숍에 대한 뮈어의 진술이 이어지고, CIA 관료들과 우리 관객은 비숍이 임무와 인간성 사이에서 항상 갈등했던 인물임을 알게 됩니다. 비숍은 스파이가 되기엔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비숍을 스파이의 세계로 끌어들인 당사자인 뮈어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비숍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번민했을 겁니다. 진술 와중에 뮈어는 CIA에서 '사이드 쇼'라는 비밀작전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게 되고, 관료들은 그것이 중국 동부의 정부청사 도청 작전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뮈어는 비숍이 작전에 참여했다가 억류당했으니 응당 구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관료들은 비숍이 '사이드 쇼'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것이 아니라, 중국 수차오 감옥에서 누군가를 독단적으로 구출하려다 억류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이때 영화는 잠시 질문을 바꿉니다. '비숍이 구출하려 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와 동시에 CNN의 보도가 터짐으로써 CIA가 나서서 비숍을 구출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지만, CIA는 거짓 정보를 흘려 톰 비숍은 이미 사망한 요원이라며 보도를 정정시킵니다. 비숍의 목숨은 다시 경각에 달렸습니다.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뮈어는 발길을 돌리고, '비숍이 구하려던 사람'에 대한 정보를 미끼로 다시 관료들과 대면합니다. 물론 뮈어의 진술은 서사 상의 미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진술을 통해 관료들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작전인 것이죠. 다만 그 진술은 '비숍이 뮈어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위험에 처한 비숍을 구하려는 뮈어와, 뮈어와 비숍 사이의 관계가 동시적/교차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인 셈입니다. '왜 비숍을 구해야만 하는가?'라는 동기를 즉각적으로 설명하기 않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자적 시점에서 극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겐 비숍의 구출에 대한 감정적 동인이 없으므로, 사안이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뮈어가 왜 조직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비숍을 구출하려 하는지 의아해합니다. 하나 이어지는 뮈어의 진술을 통해, 우리는 비숍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친구인지 알게 됩니다. 결국 베테랑 CIA 요원 네이단 뮈어를 움직이는 동기는, 국익이나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를 잃을 수 없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정(情)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건과 과거의 진술이 얽혀 있는 <스파이 게임>의 서사 구조는 비숍과 뮈어의 관계를 진행시킴과 동시에, 뮈어 또한 '스파이가 되기엔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비숍을 구출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도 절박하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뮈어처럼, 비숍도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로 수차오 감옥에 침투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앞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이야기들은 캐릭터를 겉으로 보여주기 시작해서 그 내면의 진면목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의 삶에서 타인들을 접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껍데기만을 보았을 때, 타인은 때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내면에는 끝내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의 번민이 있습니다. 이야기란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각자의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는 비숍이 '너무 위험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음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테러단체와 공모했다는 혐의로 조국인 영국에서도 지명 수배된 인물입니다. 하나 최소한 우리 관객의 눈에는 그녀가 테러를 추종하는 광신도로까진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비숍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뮈어는 비숍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충고했지만, 비숍은 끝끝내 그녀를 잃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비숍은 중요한 임무를 망칠 뻔했었고, 뮈어는 어쩔 수 없이 '플랜 B'를 가동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목표로 하던 테러리스트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엄청난 '콜래트럴 대미지(군사행동으로 인한 민간인의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고 맙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비극이지요. 그로써 비숍은 냉혹한 스파이의 세계를 떠나게 됐고, 뮈어와의 연락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이 대목은 <스파이 게임>을 양분하는 현재-과거의 서사 중 '과거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뮈어의 입장에선 오랜만에 듣게 된 친구의 소식이 '그가 곧 죽게 됐다'는 비보인 것이고, 이제 남은 것은 '현재의 클라이맥스' 즉, '뮈어는 비숍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뿐입니다.

 뮈어는 그의 생일날 비숍이 선물해주었던 힙 플라스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힙 플라스크는 휴대용 술병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위의 '비극'이 있었던 베이루트에서 선물 받은 것입니다.  철두철미한 요원인 네이단 뮈어가 술을 끼고 살 리는 없습니다. 즉, 언뜻 보기엔 어울리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나 여기에 비숍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비숍은 뮈어가 스파이를 그만두고, 언제든 편안히 술을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기를 바랐던 겁니다. 어쩌면 비숍 또한 뮈어가 '스파이가 되기엔 너무 따뜻한 사람'임을 간파했는지도 모릅니다. 차마 입밖으론 꺼내지 못한 말이 담긴, 수줍은 선물인 셈입니다. 비숍은 그날 뮈어에게 저녁으로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임무 수행으로 인해 그 약속은 영영 미뤄지고 말았습니다. 남자들이란 세상 터프한 척을 하면서도, 정작 마음이 담긴 중요한 말은 꺼내지 못하는 안쓰런 존재입니다. 할리우드 최고의 '상마초'라 불린 토니 스콧이기에, 남자들의 그런 가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CIA 내부에서 재료를 얻은 뮈어는 마침내 행동에 나섭니다. 그는 표창장에 새겨진 CIA 국장의 서명을 위조해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자신의 은퇴자금을 모조리 털어 중국 전력회사 간부를 매수해 수차오 감옥이 정전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명령서를 해군에 전달해 비숍의 구출작전을 실행하지요. 도중에 CIA 수뇌부로부터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며 문책받지만, 그조차도 예측하고 있던 뮈어는 (스파이 위성을 이용해 은퇴 후 구입할 부동산을 알아봤다는) '개인적인 일탈'로 연막을 피웁니다. 결국 스파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정보를 이용해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고, 네이단 뮈어만큼 그 방면의 베테랑은 없습니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 최후의 기만작전이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가장 솔직하고도 절실한 인간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뮈어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제외하고는 내내 버지니아 랭리의 CIA 본부에만 머물고 있는 데다, 영화 내내 총도 한방 쏘지 않습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두뇌 플레이를 통해 구출작전을 진행시키는 뮈어의 솜씨는 이 영화를 유례없는 '데스크 첩보 액션물'로 만듭니다. 관객의 이목을 끌기 위해 오직 자극과 스케일만을 동원하는 최근의 액션 영화들이 배워야 할 근면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얻어낼 만한 정보는 모두 캐냈다고 생각한 수뇌부는 뮈어를 본부 건물 밖으로 안내합니다. 이제 본부를 나서고 나면 뮈어는 더 이상 CIA 요원이 아닌 자유로운 민간인이며, 다시는 CIA 건물에 발을 디딜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뮈어는 이미 모든 작전을 마쳤습니다. 그가 본부를 나서는 동안, 비숍도 구출되어 헬리콥터에 오르고 있습니다. 뮈어의 마지막 선물로써, 그가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말이지요. 그리고 비숍은 자신을 구출한 이 작전의 이름이 '외식 Diner-out'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래전, 영영 미뤄지고 말았던 그날의 외식. 그제야 비숍은 자신을 구한 것이 뮈어임을 알게 되지요. 함께 사선을 넘나들고, 때로는 다투기도 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 비숍은 엉망이 된 얼굴로 눈물을 흘립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진행되던 <스파이 게임>의 서사는 종장에 이르러서는 '은퇴하는 뮈어'와 '구출되는 비숍'을 교차합니다. '과거'와 '현재'로서 분리되어 있던 그들의 인연이 교차편집이라는 영화적 테크닉을 통해 동시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파이 게임>은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이어내는 서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는 구출된 비숍을 끌어안는 뮈어나, 뮈어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비숍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엑셀을 힘차게 밟으며 본부를 떠나는 뮈어를 보여줄 뿐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엔딩. 어쩌면 감독인 토니 스콧은, '하고픈 말을 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남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스파이 게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걸출한 영화로 만들어 냈습니다. 토니 스콧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가 만든 영화들은 이렇게, 잊히지 않을 성취로써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