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이 Dec 30. 2021

쇼생크 탈출

우리의 삶과 벗에 대한 이야기



감독 : 프랭크 다라본트

각본 : 스티븐 킹(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촬영 : 로저 디킨스

출연 : 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 밥 건톤, 윌리엄 새들러



'잘 만들어진 좋은 영화는 반드시 관객들을 끌게 되어 있다'고 저는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쇼생크 탈출>의 미국 극장 수입은 그 믿음을 배반했죠.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저예산에 속하는 1500만 달러의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고 조기 종영됐습니다. 영화는 작가 출신 프랭크 다라본트의 두 번째 작품이었고, 유명 배우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스타도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얕본 사람들은 <폭력 탈옥>이나 <알카트라즈 탈출> 등의 탈출과 저항의 플롯을 기대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하게 틀린 기대죠. 좋은 영화를 놓치거나 깎아내리게 되는 것은 그 영화가 줄 수 없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쇼생크 탈출>의 원제는 ‘쇼생크의 구원 The 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탈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과 소중한 우정에 대한 영화죠. 


 아트시네마 전용관의 필름 라이브러리에 묻힐 뻔한 이 영화를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비디오 시장이었습니다. 영화는 비디오로, TV 상영 판권으로 극장 수입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벌어들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이 영화를 각인시켰습니다. 앤디가 하수도에서 빠져나온 직후 비 내리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는 장면은 <시네마 천국>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노인이 유언으로 남긴 ‘브룩스가 여기 있었다’는 각인은 영화사의 그 어떤 명대사보다도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이 현상은 영화가 품고 있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마력을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주말의 TV 영화 상영 프로그램으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영화를 시작부터 보지도 못했습니다. 더빙된 대사는 립싱크가 완벽하지 못했으며 화면 비율도 처참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쇼생크 탈출>은 저를 빨아들였습니다. 다라본트는, 팀 로빈스는, 모건 프리먼은, 그리고 <쇼생크 탈출>은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화롯불 앞에서 당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우리를 매료시키죠. 스콜세지의 <좋은 친구들>에 비견될 만큼 사려 깊게 써진 레드의 내레이션은 우리가 삶의 표면 안쪽에 숨겨진 것을 보도록 만들고,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쇼생크를 바꿔나가는 앤디의 행동들은 최후의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인내심의 개가를 보여줍니다. ‘감옥’하면 폭력과 마약, 동성애만 떠올리는 최근의 교도소 영화들이 배워야 할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앤디가 주인공인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간과하는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철저하게 레드의 눈과 목소리를 통해서 그를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앤디에 대한 영화라고 볼 수 없습니다. 레드가 들려주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앤디에 대해서 갖는 생각에 대한 영화죠. 따라서 영화의 스타일은 로베르 브레송을 떠오르게 하고, 우리는 앤디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앤디의 모습은 다소 집착적이기도 하고(주 의회에 도서관 기금을 요청하는 대목), 기회주의적이기도 하며(간수장과 처음으로 이해관계를 맺는 대목), 자신이 죄가 없음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그의 제자가 사건의 중요한 증인임을 알게 된 대목). 그러나 우리가 앤디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는 헌신적이고, 자유를 추구하며, 타인을 탓하지 않는 존경할만한 인물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 쇼생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이상주의적인 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리얼리스트적인 혁명가죠. 


 영화가 이룬 공훈은 연출, 시나리오, 연기, 촬영, 편집, 세트 디자인 등 다방면에 고루 퍼져 있지만 무엇보다 치하받아야 마땅한 것은 다라본트의 연출력입니다. <쇼생크 탈출>은 감옥을 다룬 영화치고 정말 드물게 감방 내부를 보여주는 장면이 극히 적습니다. 오히려 많이 보이는 것들은 쇼생크 안에서 기나긴 시간 동안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면면들입니다. 그들은 벌판에서 돌을 고르고, 지붕에서 타르를 칠하며, 도서관을 정비하고, 영화를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들처럼) 쇼생크에 적응해 갑니다. 쇼생크가 살만한 곳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떠올려야 합니다. 초반부에 한 뚱뚱한 재소자가 가엾게도 두들겨 맞아 숨을 거둘 때 쇼생크의 이미지가 어땠는지를. 이것은 다라본트가 관객을 앤디처럼, 레드처럼, 브룩스처럼 쇼생크 내부의 가혹한 조련에 익숙해지게 만들려는 고차원적인 연출 수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브룩스가 가석방을 바라지 않는 것과, 끝내 석방되어서도 배정된 가옥의 난간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라본트가 이 삶에 대한 콜라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한 수법은 더 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드라마 요소들을 배제합니다. 영화를 주의 깊게 보면, 진행이 사건의 인과 관계를 따른다기보다는 그저 사건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이웃 교도소 교도관들의 세금 정산을 해주던 앤디의 장면과 동료의 목에 칼을 겨누는 브룩스의 장면을 바로 연결시킨 것은 구성상으로 별다른 연관 관계가 없습니다. 다라본트가 이렇게 쓰고 연출한 것은 그것이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명확한 인과관계와 이해하기 쉬운 드라마가 없습니다. 그저 현상과 행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들이 뭉쳐 우리의 인생을 구성합니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요. 그래서 우리는 시간 비약을 특별하게 감싸는 잔재주가 없이도, 영화가 끝나갈 때쯤에는 앤디와, 레드와 쇼생크에서 보낸 시간이 우리의 전체 삶만큼이나 길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영화엔 두 번의 놀라운 순간이 있습니다. 한 번은 누가 뭐래도 최후의 탈옥 과정을 ‘다시’ 보여주는 시퀀스입니다. 즉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앤디가 이미 사라진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탈옥 과정을 보게 되므로, 거기엔 '긴장감'이 없습니다. 대신 '놀라움'이 자리하죠. 다른 감독들이라면 플래시백보다는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다라본트는 전날 밤 앤디가 손에 쥔 밧줄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자살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간수 중 하나가 앤디의 감방에 들어가서 놀라는 얼굴을 보여주는 대목도 앤디가 목을 매달았을 거라는 착각을 유도하게끔 연출되어 있죠. 앤디가 탈출했음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또 한번 앤디라는 캐릭터를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탈출 과정이 플래시백으로 보여지는 이유도 바로 앤디라는 캐릭터의 본질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죠. 


 다른 한 번의 놀라운 순간은 정확히 영화의 허리에 존재하는 음악 감상 시퀀스입니다. 앤디가 주의회로부터 지원받은 자료들 속에서 ‘피가로의 결혼’ LP판을 꺼내 듭니다. 그는 그것을 턴테이블에 물려 놓고, 스피커를 통해 교도소 전체에 울려 퍼지도록 합니다. 앤디는 문을 잠그고, 죄수들과 간수들은 음악을 듣습니다. 그들은 음악에 완전히 매료됩니다. 다른 영화들이 물대포와 화염병을 던지며 항전할 때 <쇼생크 탈출>은 음악을 틉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듣는 이들의 표정을 봅니다. 순수하게 음악에 빠져든 죄수들의 표정이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면죄부는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어쩌면 이런 곳에 있어야 될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작은 믿음을 줍니다. 음악에 반응하는 그들의 표정은 그들의 마음 깊숙이 숨어버린 영혼을 끄집어냅니다. 앤디는 단지 음악을 들려줬고, 다라본트의 카메라는 단지 그것을 듣는 이들의 표정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앤디가 혼자 탈출해버리고 나면 외로워하는 레드만 남습니다. 주름 하나 없던 나이에 입소하여 언제 석방될지 모르는 그는 희망을 버립니다. 그는 가석방 심사위원들을 눈앞에 두고, 자신이 생각하는 교화에 대해서 읊조리죠. 심사위원들은 승인 도장을 찍습니다. 석방 이유는 그가 교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화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조리야말로 <쇼생크 탈출>이 말하는 인생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조리한 인생에 갇혀,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삶에 적응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단순한 생존이라는 굴레에 갇히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렇게 살다 보면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에서 석방되죠. 그때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칼로 새긴 나무판의 각인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고, 우리의 삶을 생존이 아닌 실존으로 만들어줄 앤디 같은 친구입니다. 


 만약 앤디의 탈출에 공범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입니다. 자연은 앤디가 돌을 내려칠 때마다 천둥을 울려 소리를 감춰줍니다. 감옥 벽은 앤디를 위해 풍화되었죠. 비는 도망친 앤디의 흔적을 지워 줍니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구원을 찾는 자에게 의지의 신이 건네는 도움의 손길입니다. 물론 우리는 앤디가 아닙니다. 우리는 레드에 가까울 겁니다. <쇼생크 탈출>은 다만 기회가 된다면, 당신도 앤디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이번 생도 잘 부탁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