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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taetae Oct 29. 2022

99년생이 바라본 <90년생이 온다>

90년대생의 끝자락에 서서

90년생이 온다, 임홍택, whale books.


  이름에 끌렸다.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문법을 신경 쓰며 ‘90년대생’, ‘90년대생들’이 온다라든지 용어를 빌려와 ‘밀레니엄 세대가 온다’, ‘MZ세대가 온다’라는 제목을 썼다면, 나는 절대로 이 책을 펴지 않았을 것이다. 90년생이 오기 때문에 이 책을 펼쳤다. 99년생으로서, 90년대생의 끝자락에 서서 실지로 90년대생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미디어에서 들려오는 낯부끄러운 MZ세대 혹은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요망스런 분석이 아닌 냉철하고 정확한 분석을 듣고 싶었다. 마치 인간은 거울에 끌리도록 설계돼있는 것처럼.


  세대란 무엇인가? 일단 사전을 살펴본다. 다양한 뜻이 보인다. 우리는 당면한 시대를, 한 생물의 생에 대한 기간을, 30년 정도의 기간을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우리가 관심 가지는 뜻은, 그 많은 정의 중,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이다. 즉, 세 가지 조건이 붙는다. 1) 같은 시대 2) 공통의 의식 3) 비슷한 연령층. 먼저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이스맨은 실격이다. 둘째, 생각이 비슷해야 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의 공간이든 가상의 공간이든, 그것이 이성의 공간이든 감성의 공간이든. 이때, 앞의 두 가지 조건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조건은 아니다. ‘비슷’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모호하긴 하지만 우리는 대강 그것에 합의하고 있고-개인적으로 위아래로 3- 이를 따라가다 보면 주위에 몇 명 안 남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대’라는 미명 하에 묶인 이들은 사회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사회는 수많은 세대들로 채워진다.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사회에 적응함과 동시에 사회를 변화시키려 도전한다. 그와 다른 공통의 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에 힘을 보태주기도,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하고는 막기도 한다. 누가 이기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사회는 수많은 세대들로 꽉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세대들이 이 사회의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유지하고 다시 변화시키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회학자들은 여기서 딜레마의 빠진다. ‘분명 세대는 중요하고 또 중요한데… 어떻게 이름을 붙여야 하나…’ 왜냐하면 애매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특히 그렇다. 이 책에서 나는 가까스로 90년대생으로 분류된다. 99년생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그것은 사실이고, 책의 내용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00년대생들의 특징을 말할 때 오히려 더 많이 공감하기도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90년도의 생활이 아닌 00년도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있다 보니 X, Y, M, Z 등등의 미명들은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단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대부분의 세대 이론들은 설명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90년대생의 특징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간단, 둘째, 재미, 셋째, 정직. 물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간단하고, 재미있고, 정직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복잡한 것, 재미없는 것, 교활한 것을 좋아하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그런데 90년대생들은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이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려 하며, 더 나아가서는 사회를 재구성하려 든다. 이것은 실로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근면성실, 희생, 국가발전, 공동체, 배려, 한편으론 오늘 먹을 세 끼가 중요했던 이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방식을 넘어 도전으로 들릴 수 있다. 

  90년대생들의 이런 발칙한 도전은 기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패닉을 일으켰다. 즉, 지금까지와는 180도 다른 이들이 출몰한 것이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들이 등장한다. “나 때는 말이야..”, “요즘 젊은 놈들은..”. 그러나 이 말은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점토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소크라테스의 말 그리고 한비자의 책에서도 등장한다고 한다(p.66).


  스티븐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 연설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바로 새로운 세대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여러분도 점차 기성세대가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p.12)”. 다시 말해, 영원히 세대는 교체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새로운 세대는 없다. 2022년을 살아가고 있는 90년대생으로서, 나는 새로운 세대에 포함된다 말할 수 있다. 99년생이니깐 뭐 2030년까지도 바라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나의 부모님도 나와 똑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는 얘기다. 비록 나에게 아직도 부모님은 청춘 같아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육체적 젊음의 시대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 세대도 “나 때는..”을 들었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판단은 두 가지로 갈린다. 공존하거나 배척하거나. 자신이 바뀌든가 타인을 바꾸든가.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여기서 교사의 경우, 필연적으로 평생 난처함을 겪어야만 한다. 매년 새로운 이들이 몰려온다. 정말이지 ‘몰려온다’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그들과 나는 어쩌면 대부분의 것들이 다를 수도 있다. 그들이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며 성장의 이동을 하는 유목민들이라면 나는 학교라는 공간에 위치하며 새로운 이들을 기다리는 정주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잠시 기억나는 교사의 별명을 떠올려보자. 이에 대한 양적 통계를 내리는 것은 힘들겠지만, 나는 분명 ‘꼰대’라는 별명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것은 교사뿐 아니라 수많은 직업에 적용되겠지만, 특히 가르침을 위한 존재와 가르침을 받기 위한 존재가 한 곳에 모인 학교라는 공간에서 강조된다. 우리 대학교 2학년 실습 과정은 ‘참관’이다. 말 그대로 참관하는 것이다. 배정받은 학년을 중심으로 생활적인 측면을 함께 하고, 수업은 거의 공평하게 모든 학년을 참관할 수 있도록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제 막 도전을 시작하려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의 눈에도 교실을 들어간 순간 그 교실의 담임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어레짐작은 대부분 맞아떨어진다. 꼰대인지, 아닌지. 학생은 그 교사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마치, 先生이라는 한자가 말해주듯이. 


  세대론의 장점은 편리하다는 것이다. 세대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점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세대론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흔히 ‘MZ시대의 특성’, 혹은 어떤 인물을 지칭해 ‘MZ시대의 아이콘’이라 말하는 것을 접할 수 있다. 이를 접하다 보면 괜히 반발심이 든다. ‘나는 트위터, 인스타나 틱톡을 하지도 않는데… ’ , ‘저 사람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하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괜한 반발심이 생겼던 적이 많다. ‘조금 과하다’, ‘이건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하며. 아마 이 생각을 한 번쯤은 가졌던 적이 있으리라. 그 이유는 이 분석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우리는 어쨌든 사회를 살고 있음과 동시에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 개인 각각은 다르며, 또 다르다. 다시 말해, 한 세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도 천차만별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대론을 이해할 때 개인이 가려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이것은 이거다’ 식의 논리를 조심해야 한다. 

  이상의 논의는 우리에게 ‘epoche(판단 중지)’를 요청한다.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 회의론자부터 데카르트, 후설로 이어지며 사용되었다. 그들은 판단 중지를 매사에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들은 가치가 결부된다. 그리고 그 가치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에 판단은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즉, 옳은 판단을 위해선 일단 한 템포 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괄호 치기( )’, ‘epoche(판단 중지)’라고 하였다. 이는 새로운 세대들에 대한 태도에도, 그리고 세대 자체를 바라보는 인식에도 적용된다. 다시, 판단의 두 가지 갈래길에 위치한다. 물론, 이마저도 epoche를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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