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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Nov 26. 2022

주간 씀 모음 21

흐릿한


  차라리 흐린 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것이 흐릿한 모습 그대로, 얼버무리면서 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결국 그렇게 살지 못할 운명인가 봐. 바보 같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 이렇게 태어났는걸. 네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현실의 모습은 나에겐 전혀 보이질 않아. 보이는 거라곤 무서워질 정도로 넓은 하늘과 투명한 파란색, 그리고 멀리서 손짓하는 구름뿐이야. 그게 내 전부야. 



여운


  기껏 수많은 싸움과 불화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나도, 그리고 너도. 삶은 불투명했고 인생은 방향을 잃었다. 우리는 마치 길 잃은 철새처럼 희미한 본능과 불안만을 남긴 채 세상에 표류했다.

  그래도 함께했던 시간만큼은 여운이 남았다. 



오랜 시간


  말하자면 그건 오랜 시간이었다. 시작도 끝도 의미가 없고, 그것을 품고 있는 지금만이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

  각오가 되어 있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영원히 감내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눈앞에 닥쳐온 현실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가 퇴색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렇게 존재했다. 



시련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땅에서 갑자기 솟았는지 모를 삶이야.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한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뭐. 결국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인생이 제멋대로 굴러가도, 나처럼 의도치 않게 묘한 존재가 되어버려도, 바로잡으려 한 일이 결국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일이 되어도. 그냥 삶을 살 수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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