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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Dec 13. 2022

주간 씀 모음 22

달빛 한 조각


달빛


  달빛이 창 너머에서 백금처럼 빛났다.

  고요한 방 안은 내가 나가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 뿌리내리고 지내던 방을 이윽고 등진 채 거리를 향해 나가며 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한때 네가 있던 자리는 지금도 어두운 그대로. 달빛에 닿아 덧없이 부서졌다.



동화


  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한껏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공기는 질색이었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지난 여름철 충만했던 생명력을 여지없이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지피던 열기와 생동감이 차갑게 식어갔다.

  이제 모든 것이 쓸쓸해지겠지. 힘을 잃은 나뭇잎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매년 이맘때쯤, 빛을 잃은 낙엽을 보며 그녀는 우울의 늪에 빠져들곤 했다.

  낙엽 대신 과자라도 떨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동화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상상이 마음에 들었다. 마침 가을에는 할로윈이라는 축제도 있으니. 사탕, 과자, 초콜릿과 같은 달콤한 선물이 거리의 빈 구멍을 메꿔주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우울했을 텐데.



어린 시절


  어찌 됐건, 그건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이제 와서 아무리 괴로워하고 후회해도 다시는 닿을 수 없이 멀어진 기억.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어린 나와, 그럼에도 끔찍한 기억은 계속 붙들고 있는 지금의 나에 대한 공격은 잠시 멈춰 두도록 하자. 아무래도 그 고통은 평생에 걸쳐 이어질 것이므로.

  그때 내 눈앞에 나타났던 하얀 두 손을 나는 어째서 잡지 않았던가. 그 작은 행동의 결과가 지금의 나로 이르는 길을 만들었다. 이 까마득한 길을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영혼을 바치는 것 따위 얼마나 하찮고 단순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작은 손 위에 나의 영혼을 기꺼이 올려놓았어야 했다.



차창


  차창 너머로 밝은 달빛이 비쳤다. 하루 종일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이렇게 늦은 시간이 다 되어서야 그 반짝이는 얼굴을 슬쩍 내미는 모습이 꽤 얄미웠다. 가을 하늘은 맑았고, 그래서 시커먼 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밝게 보이는 것은 하늘 높이 솟은 빌딩의 불빛과 그 뒤에 숨어 있는 달빛 뿐.

  낙엽이 떨어지듯,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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