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 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설한장 Jan 17. 2023

주간 씀 모음 24

명장면


  “이거 참 명장면이군.”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목에선 힘줄이 솟아 있었다. 꽤나 열받은 모양이었다. 거대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분위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피. 내가 요구한 건 그것뿐이었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도. 그러나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유감이다.”

  거구의 사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는 아직도 피가 솟구쳐 오르고 있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앞으로 있을 운명에 기도라도 올리는 듯한 심정으로. 



시간 낭비


  삶은 모든 것을 걸고서 세상과 싸우는 투쟁인가? 아니면 그저 물 흐르듯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는 순응인가?

  타인을 위한 일을 하며 몸이 닳고 있는 사람도,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하며 좌절에 빠진 사람도, 모두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땅을 기어다는 개미를 보아도, 나무 위에서 날아오르는 까치를 보아도, 그 어떤 것이 의미 있는 삶을 자아내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시간 낭비인가? 그런 의문을 떠올리는 것도 좋다. 아직까지는 삶의 가운데에 있으니까. 



오래된 책


  “먼 미래에 말야. 내 이야기가 오래된 책으로 남아 있다면 어떨까?”

  오후 4시, 반짝이는 금빛 태양을 뒤로한 채 네가 말했다.

  “책? 무슨 내용으로?”

  “그냥 내 이야기. 살면서 어떤 고민을 했었고, 어떤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그런 내용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빛바랜 낡은 책을 떠올렸다. 그녀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역시 별로 재미없으려나.”

  “인기가 많을 것 같지는 않아.”

  “냉정하네.”

  “솔직한 거지.”

  “그래도 좋아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먼 옛날에도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삶을 산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

  “먼 미래에도 우리처럼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뜻이구나?”

  “아, 그렇게 되나?”

  의미도 없이 무방비한 웃음이 번졌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여유로운 오후였다. 



노을


  그건 노을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푸르고 하얀, 화창한 하늘만을 보여주던 세상을 가차 없이 물어뜯으며 새빨간 색으로 물들이는 노을. 그 화신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첫눈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눈처럼 하얗고 덧없는 존재.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솟구치는 피는 이제 덧없는 설원을 녹이고 대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맥동하는 힘이 몸을 뒤집으며 피를 뿜어냈다. 생명력, 너무나도 강한 생명력이 공기를 덮었다.

  그 존재는 내게 똑똑히 전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렬한 생명이 지금 이곳을 정복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런 피의 축제야말로 생명을 위해 바쳐져야 할 가장 고귀한 찬가임을.

  그것은 찬란한 정복자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간 씀 모음 2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